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일본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의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하고 화려한 성곽 문화와 조총 군대를 구축한 일본의 역사 시대입니다.(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이 조선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5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과학 발전, 한글 창제를 이룩한 한반도의 왕조입니다.을 침공하면서 일어난 국제 전쟁입니다. 초기 조선 관군의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 탁월한 전술과 거북선, 판옥선 운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지켜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의 장군입니다.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 전국 각지 의병들의 유격전 활약, 그리고 명나라 - 1368년 태조 주원장이 몽골의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통일 제국을 재건한 동아시아의 대제국입니다. 구원병과의 조·명 연합군 형성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동아시아 3국의 정세를 흔든 거대한 전쟁이었습니다.
위치한반도, 남해 해역, 황해
교전국조선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5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과학 발전, 한글 창제를 이룩한 한반도의 왕조입니다., 명나라 - 1368년 태조 주원장이 몽골의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통일 제국을 재건한 동아시아의 대제국입니다.,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의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하고 화려한 성곽 문화와 조총 군대를 구축한 일본의 역사 시대입니다.
배경 및 맥락
16세기 말 동아시아 정세
동아시아 3국의 정세 변화
일본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의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하고 화려한 성곽 문화와 조총 군대를 구축한 일본의 역사 시대입니다.은 오다 노부나가 -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조총 전술과 개혁 정책으로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다이묘입니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의 야망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입니다.에 의해 10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한편 조선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5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과학 발전, 한글 창제를 이룩한 한반도의 왕조입니다.은 200여 년간의 평화로 군비가 느슨해져 있었으며, 명나라 - 1368년 태조 주원장이 몽골의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통일 제국을 재건한 동아시아의 대제국입니다.는 북방 여진족의 부상과 내부 재정 악화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1591년 4월
정명가도(征明假道) 요구와 침공 준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정복 전쟁으로 비대해진 영주(다이묘)와 무사 세력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대륙 진출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명나라를 칠 터이니 길을 내어달라'는 정명가도를 내세우며 대규모 침략군을 조판 및 정비했습니다.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 개전과 부산포 상륙
일본군 대함대가 부산포에 기습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진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함락되었습니다.
전개 과정
1592년 5월, 일본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의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하고 화려한 성곽 문화와 조총 군대를 구축한 일본의 역사 시대입니다.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의 야망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입니다.는 명나라 - 1368년 태조 주원장이 몽골의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통일 제국을 재건한 동아시아의 대제국입니다.를 정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5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과학 발전, 한글 창제를 이룩한 한반도의 왕조입니다.을 전격 침공했습니다. 조총이라는 신문기로 무장하고 장기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 대군에 맞서, 오랜 평화에 젖어 있던 조선 육군은 연이어 패배했습니다. 신립 -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퇴했던 명장으로,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전사한 조선의 무신입니다. 장군이 충주 탄금대 - 충주 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 남한강 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 명승지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기가 막힌 역사적 이야기를 간직한 곳입니다. 탄금대라는 이름은 가야의 3대 악성 중 한 명인 우륵 선생의 민담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탄금대의 기암절벽 위에 앉아 남한강의 절경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가야금 곡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의 맑고 가슴을 울리는 가야금 소리에 강물의 물고기들과 숲속의 새들도 멈추어 음악을 감상했고, 바위에 줄을 튕겼다 하여 '가야금을 탄 대'라는 뜻의 '탄금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하지만 탄금대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참혹했던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장군 신립은 일본군 대군을 맞아 배수진(배 뒤에 강을 등지고 목숨 걸고 싸우는 진법)을 치고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기병의 공격력을 믿었으나 비와 논밭 지형으로 인해 기병대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 육군 주력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신립 장군을 비롯한 많은 장병들이 강물에 몸을 던져 전사한 가슴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입니다. 에서 배수진을 치고 맞서 싸웠으나 패하면서, 선조 왕과 조정은 한양을 떠나 개성, 평양, 나아가 의주까지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전쟁 개시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육지에서의 연이은 패배 속에서 전쟁의 흐름을 반전시킨 것은 바다였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 탁월한 전술과 거북선, 판옥선 운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지켜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의 장군입니다.과 경상우수사 원균 - 초기 해전에서 이순신과 합류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지휘관 교체 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조선의 무신입니다.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 사천, 한산도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연속으로 격파했습니다. 특히 좁은 견내량에서 거짓 후퇴로 적을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화포를 장착한 판옥선 - 판옥선은 조선 명종 시기(1555년)에 처음 개발되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2층 구조의 대형 군함입니다. 배 덮개 위에 지붕 모양의 널판(판옥)을 얹어 복층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층에서는 노를 젓는 노군들이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위층 상갑판에서는 포수와 사수들이 탁 트인 시야에서 화포와 활을 쏠 수 있었습니다. 평평하고 튼튼한 바닥 구조(평저선) 덕분에 울돌목이나 한산도 등 조류가 거센 한반도 연안에서도 방향 전환과 제동이 빠르고 안정적이었습니다. 또한 튼튼한 소나무재 구조 덕분에 가벼운 삼나무로 만들어진 일본 함선들과 부딪히는 쇄도 격파 전술이나 중화포 포격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발휘했습니다.과 거북선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 실전에 투입한 조선의 특수 군함입니다. 배의 위쪽을 판자로 덮고 뾰족한 쇠못을 꽂아 적이 배 위로 뛰어오르지 못하게 막았으며, 용머리를 포함해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는 무적의 돌격선이었습니다.을 활용한 학익진 - 학익진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쳐 적을 감싸 안듯 함대나 군사를 반원형(V자나 U자형)으로 배치하여 포위 사격하는 해전 및 육전 진법 전술입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선보인 해상 학익진이 가장 유명합니다. 유인 함대를 앞세워 적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신호에 따라 일제히 좌우 날개를 펼쳐 적 함대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포위하고 집중 포격을 퍼부어 몰살시켰습니다. 뛰어난 지휘 통제와 함선의 신속한 선회력이 필수적인 고난도 전술입니다. 매복 포위 전술로 한산도 에서 대승을 거두어 일본의 바다 보급선을 완벽히 차단했습니다. 바닷길이 막히면서 육지의 일본군도 식량과 무기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한산도 대첩: 견내량에서 적을 유인한 뒤,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 포위 매복 전술로 일본 수군 주력을 격파한 해전.
바다의 승리와 더불어 육지에서는 곽재우 -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붉은 옷을 입고 전공을 세운 홍의장군입니다., 고경명 - 호남에서 대규모 의병을 모아 금산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의병장입니다., 사명대사 - 승병 부대를 이끌어 육지 전투에 기여하고 전쟁 후 사신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구출해낸 승병장입니다. 등의 의병이 보급로를 교란했습니다.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대첩 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3천8백여 관군·민간인과 함께 화포 사격 및 곽재우 등 의병의 야간 횃불 연계 작전으로 일본군 2만 5천 공세를 물리쳐 호남 곡창 지대를 지켰습니다. 이에 조·명 연합군은 1593년 초 평양성 을 탈환하고 남하했으며, 권율 - 이치 전투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 육군 전력을 총지휘한 도원수입니다. 장군이 한양 턱밑 행주산성 에 진을 치자 한양의 일본군이 위협을 느끼고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행주대첩으로 대패했습니다. 일본군은 한양에서 남해안으로 후퇴한 뒤 1593년 6월 9만 3천 대군으로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일으켰습니다. 6천 조선군이 9일간 저항했으나 함락되어 7만 민관군이 희생되는 비극(논개 - 제2차 진주성 전투 함락 후 촉석루 승전 잔치에서 왜장을 유인해 남강 의암 바위에서 함께 투신하여 순국한 애국 여성입니다. 바위 전설 등)을 겪었으나, 일본군도 괴멸적 피해를 입고 호남 진출 동력을 상실했습니다.
행주산성 전투: 훨씬 많은 일본군을 상대로 산성을 지켜낸 조선군의 방어전.
한양에서 후퇴한 일본군이 남해안 왜성에 진을 치면서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대규모 원정군 유지에 부담을 느낀 명나라와 전력이 소모된 일본이 휴전 회담을 벌였으나 1596년 결렬되었습니다. 한편 높은 신망을 얻은 이순신 장군은 선조 왕의 강한 의심과 견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조정 내부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을 지지하는 대신들 간의 정치적 알력 다툼이 심해졌고, 원균 측의 지속적인 모함도 이어졌습니다. 이때 일본 첩보원(요시라 - 조선어에 능통한 대마도 장수 소 요시토시의 부하로, 정유재란 직전 거짓 정보 공작으로 조선 조정에 여론을 흔든 일본의 첩보원입니다.)의 '가토 - 일본군 제2군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함경도까지 진격하고 정유재란과 행주대첩, 울산성 전투에서 싸운 일본의 다이묘입니다. 공격' 거짓 첩보를 발단으로, 선조 왕과 조정은 왕명 불복종 죄목을 씌워 이순신을 파직하고 투옥했습니다. 결국 왕권 견제와 정치 세력의 암투 속에서 이순신을 대신해 원균이 후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 정유재란(丁酉再亂)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진행된 7년간의 임진왜란 중에서, 1597년(정유년)에 일본이 조선을 다시(再) 침략하여 일어난 2차 전쟁을 말합니다. 1593년부터 진행되던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대군을 파견했습니다. 조선 수군과 명나라 구원병의 활약, 그리고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이 전면 철수하면서 7년 임진왜란 전체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일어난 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수군 단독 부산 출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육군과의 협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조 왕과 조정, 도원수 권율은 조속한 해상 공격을 강력히 독촉하며 원균에게 곤장까지 쳤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원균은 전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출전했으나, 적의 회피 작전과 가덕도 기습으로 군사들이 완전히 지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거제도 칠천량 해역으로 후퇴해 정박해 있던 조선 수군은, 야간에 기습 포위 공격을 감행한 일본 수군에 대패하며 함선 대부분을 잃고 원균 장군도 전사했습니다. 이 패배로 남해안의 제해권이 일시 상실되었습니다.
칠천량 패배로 조선 수군이 궤멸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습니다. 복직 당시 남아있는 배는 단 12척(후에 13척)뿐이었습니다. 칠천량 대승으로 방심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과소평가했고, 서해 진입 보급로를 열기 위해 울돌목 길목으로 133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진격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를 놓치지 않고 좁은 해협에 배를 일렬로 배치해 적의 진입을 막은 뒤, 거센 조류 변화와 소용돌이를 활용한 명량 해전 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명량 해전: 울돌목의 거센 조류를 활용하여 단 13척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물리친 대승.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남해안의 일본군은 철수를 모색했습니다. 조·명 연합 수군은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군 제1군 선봉장으로 부산 상륙과 평양성 점령을 이끌고 휴전 회담을 주도했던 일본의 다이묘입니다.의 왜군을 견제하며 노량 해협에 매복했습니다. 순천왜성을 구하러 달려온 시마즈 요시히로 - 사천성 전투를 이끌고 노량 해전에서 고니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구원 함대를 몰고 참전한 일본의 무장입니다.의 구원 함대를 노량 해전 에서 기습 포격으로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며 7년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습니다.
노량 해전: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척 유인하며 노량에서 구원 함대를 매복 공격해 물리친 해전.
1592년 5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대륙 진출의 야망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인물입니다.의 명령을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군 제1군 선봉장으로 부산 상륙과 평양성 점령을 이끌고 휴전 회담을 주도했던 일본의 다이묘입니다.의 일본 -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의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하고 화려한 성곽 문화와 조총 군대를 구축한 일본의 역사 시대입니다.군 제1군 대함대가 부산포 해안에 기습 상륙하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이 이끄는 군민이 성을 잠그고 결사 항전했으나 수적 열세와 조총 사격에 전멸했고, 이어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며 맞섰으나 함락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조선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5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과학 발전, 한글 창제를 이룩한 한반도의 왕조입니다.의 1차 관문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 육군의 한양 북진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습니다.
조선 조정이 북방의 검증된 명장 신립 -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퇴했던 명장으로,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전사한 조선의 무신입니다.을 삼도순변사로 파견해 왜군을 저지하려 한 전투입니다. 신립은 문경새재의 험준한 산악 요새 대신 충주 남한강을 뒤에 등진 탄금대 - 충주 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 남한강 가의 절벽 위에 위치한 명승지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기가 막힌 역사적 이야기를 간직한 곳입니다. 탄금대라는 이름은 가야의 3대 악성 중 한 명인 우륵 선생의 민담 전설에서 유래했습니다. 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탄금대의 기암절벽 위에 앉아 남한강의 절경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가야금 곡을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의 맑고 가슴을 울리는 가야금 소리에 강물의 물고기들과 숲속의 새들도 멈추어 음악을 감상했고, 바위에 줄을 튕겼다 하여 '가야금을 탄 대'라는 뜻의 '탄금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하지만 탄금대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참혹했던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장군 신립은 일본군 대군을 맞아 배수진(배 뒤에 강을 등지고 목숨 걸고 싸우는 진법)을 치고 탄금대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기병의 공격력을 믿었으나 비와 논밭 지형으로 인해 기병대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 육군 주력이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신립 장군을 비롯한 많은 장병들이 강물에 몸을 던져 전사한 가슴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장소입니다. 평야에 배수진을 쳤습니다. 조선 기병대의 강력한 돌격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려 했으나, 전날 내린 비로 바닥이 진흙밭이 되어 기병의 기동력이 무력화되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은 조총 전술과 매복 공세로 조선군을 포위해 가며 조총 폭격을 퍼부었고, 조선 정예 육군 8천여 명이 괴멸하며 수도 한양이 방어막 없이 함락되는 결정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2년 8월, 조선 연합 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굳힌 해전입니다. 이순신 - 탁월한 전술과 거북선, 판옥선 운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지켜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의 장군입니다. 장군은 좁은 견내량에서 거짓 후퇴하여 와키자카 야스하로의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했습니다. 조선 함대는 일제히 학이 날개를 펼친 '학익진 - 학익진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쳐 적을 감싸 안듯 함대나 군사를 반원형(V자나 U자형)으로 배치하여 포위 사격하는 해전 및 육전 진법 전술입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선보인 해상 학익진이 가장 유명합니다. 유인 함대를 앞세워 적 함대를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신호에 따라 일제히 좌우 날개를 펼쳐 적 함대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포위하고 집중 포격을 퍼부어 몰살시켰습니다. 뛰어난 지휘 통제와 함선의 신속한 선회력이 필수적인 고난도 전술입니다.'으로 적을 포위했습니다. 선두에 선 거북선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 실전에 투입한 조선의 특수 군함입니다. 배의 위쪽을 판자로 덮고 뾰족한 쇠못을 꽂아 적이 배 위로 뛰어오르지 못하게 막았으며, 용머리를 포함해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가는 무적의 돌격선이었습니다.이 적진을 뒤흔들고 판옥선 - 판옥선은 조선 명종 시기(1555년)에 처음 개발되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으로 활약한 2층 구조의 대형 군함입니다. 배 덮개 위에 지붕 모양의 널판(판옥)을 얹어 복층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아래층에서는 노를 젓는 노군들이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위층 상갑판에서는 포수와 사수들이 탁 트인 시야에서 화포와 활을 쏠 수 있었습니다. 평평하고 튼튼한 바닥 구조(평저선) 덕분에 울돌목이나 한산도 등 조류가 거센 한반도 연안에서도 방향 전환과 제동이 빠르고 안정적이었습니다. 또한 튼튼한 소나무재 구조 덕분에 가벼운 삼나무로 만들어진 일본 함선들과 부딪히는 쇄도 격파 전술이나 중화포 포격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발휘했습니다.이 일제 포격을 퍼부어, 일본 함선 70여 척 중 59척을 격파하며 적 주력을 괴멸시켰습니다.
1593년 2월, 조명 연합군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되찾기 위해 벌인 대규모 공성전입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끄는 4만 명나라 대군과 유정(사명대사 - 승병 부대를 이끌어 육지 전투에 기여하고 전쟁 후 사신으로 건너가 조선인 포로 3,000여 명을 구출해낸 승병장입니다.)의 승병을 포함한 조선군 1만여 명이 합동 공격을 펼쳤습니다. 연합군은 명나라의 대형 대포인 불랑기포와 신기전을 대거 동원해 성벽과 왜적 무리를 무차별 포격했습니다. 고니시의 일본군은 성벽과 토성에서 조총으로 저항했으나 화력에 밀려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남쪽 한양으로 야간 후퇴했습니다. 이 승리로 전쟁의 주도권이 조명 연합군으로 완전히 넘어왔습니다.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3,800여 명의 관군과 민간인(여성 포함)을 이끌고 일본군 25,000명의 대공세를 물리친 전투입니다. 조선군은 현자총통과 폭발형 질려포통 등 화포를 총동원해 성벽을 사수했고, 성 밖에서는 곽재우 -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붉은 옷을 입고 전공을 세운 홍의장군입니다. 등의 의병이 야간 횃불 작전과 기습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했습니다. 6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후퇴시켰고, 조선의 최대 곡창 지대인 호남을 완벽히 수호했습니다.
1593년 3월, 전라도 순찰사 권율 - 이치 전투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 육군 전력을 총지휘한 도원수입니다. 장군이 2천3백여 명의 관군과 승병, 부녀자를 포함한 백성들을 모아 고양 행주산성 목책에 배수진을 치고 벌인 쾌거입니다. 한양에 집결해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와 가토 기요마사 - 일본군 제2군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함경도까지 진격하고 정유재란과 행주대첩, 울산성 전투에서 싸운 일본의 다이묘입니다.의 일본군 3만 대군이 9개 부대로 나뉘어 7차례나 연속으로 산성을 몰아쳤습니다. 조선군은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첨단 화약 무기와 부녀자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 투척한 '행주치마' 협동으로 적을 물리쳤습니다. 왜군 1만여 명이 부상을 입고 퇴각하면서 한양의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전면 후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3년 6월, 1차 패배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군 9만 3천여 대군이 진주성을 재침공했습니다.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이끄는 6,000여 조선 군민이 9일 동안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함락 후 7만여 민관군이 희생당하는 비극 속에서 의기 논개 - 제2차 진주성 전투 함락 후 촉석루 승전 잔치에서 왜장을 유인해 남강 의암 바위에서 함께 투신하여 순국한 애국 여성입니다.가 적장을 안고 남강 의암에 투신한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도 극심한 피해를 입어 전라도 진출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1597년 8월, 조선 수군이 대패한 해전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 초기 해전에서 이순신과 합류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지휘관 교체 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조선의 무신입니다.은 수군 단독 부산 진격의 위험을 경고했으나, 선조와 권율의 강력한 출전 독촉과 곤장 처벌로 무리하게 전 함대를 이끌고 출전했습니다. 부산포 추격전과 가덕도 기습으로 병사들이 지친 상태에서 거제도 칠천량 해역으로 후퇴하여 경계를 소홀히 정박했습니다. 이에 일본 수군 함대가 야간에 칠천량을 겹겹이 포위한 뒤 새벽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칠천량에 갇힌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 160여 척을 잃고 원균 등 장수들이 전사했습니다.
1597년 10월, 백의종군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일본 대함대를 궤멸시킨 세계 해전사의 기적입니다. 이순신은 남아있는 선박이 13척뿐이자, 전남 진도 울돌목(명량 해협)의 좁고 바위가 많은 지형과 소용돌이치는 거친 조류 변화를 전술로 이용했습니다. 좁은 해협에 배를 횡렬로 배치해 거센 소용돌이 속으로 왜선들을 몰아넣은 뒤, 전면 포격을 퍼부어 적선 31척을 수장시키고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전사시켰습니다. 이 승리로 왜군의 서해 진입을 다시 한번 완벽히 저지했습니다.
1598년 12월, 조·명 연합 수군은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척 위장하면서, 구원하러 오는 적 함대의 길목인 노량 바다에 매복했습니다. 고니시를 구하려 달려온 시마즈 요시히로 - 사천성 전투를 이끌고 노량 해전에서 고니시 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구원 함대를 몰고 참전한 일본의 무장입니다.의 일본 함선 500여 척이 좁은 노량 해협으로 들어서자, 연합 수군은 야간 기습 포격과 화공 전술로 포위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 전술로 일본 함선 300여 척을 파괴하고 구원 함대를 대패시켰습니다. 추격전 중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면서 7년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습니다.
결과조선·명 연합 수군 승리 (전쟁 종결)
예술 및 유산
동래부순절도 (東萊府殉節圖)
미상, 18세기
🏛️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초기 부산 동래성에서 송상현 부사와 백성들이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맞서 결사항전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입니다.
부산진순절도 (釜山鎭殉節圖)
미상, 1760년경
🏛️ 국립진주박물관
1592년 4월 부산진첨사 정발과 군민들이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에 맞서 최후까지 항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입니다.
수군조련도 (水軍操練圖)
미상, 조선 후기
🏛️ 국립해양박물관 등
조선 후기 삼도 수군이 모여 훈련하는 장엄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판옥선과 거북선의 진형 배치와 학익진 등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순신 장검 (長劍)
태귀련·이무생, 1594년
🏛️ 현충사, 아산
한산도 진영에서 이순신을 위해 만든 길이 2미터에 가까운 칼 두 자루입니다. 실제 싸움에서 휘두르기에는 너무 커서, 지휘관의 상징으로 곁에 세워 두었고 칼마다 그가 고른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총 (鳥銃, 화승총)
일본 총포 장인, 16세기
🏛️ 국립진주박물관
1592년 일본군이 육지 전투에서 우위를 잡게 해 준 화승총입니다. 불붙인 심지로 화약을 터뜨리는 방식이라 다시 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여러 명이 줄지어 한꺼번에 쏘면 조선 활 부대의 대형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이장손 (제작자로 전함), 1590년대
🏛️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진주박물관
속이 빈 무쇠 공 안에 화약과 쇳조각을 채우고, 나무로 만든 심지 장치를 넣어 터지는 시간을 늦춘 폭탄입니다. 완구라는 발사기로 성 안에 던져 넣으면 떨어진 뒤 한참 있다 터져서, 일본군이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천자총통 (天字銃筒)
조선 관영 주조소, 16세기
🏛️ 국립진주박물관
조선 청동 대포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판옥선 같은 전함에 실어 큰 나무 화살(대장군전)이나 돌탄을 쏘았습니다. 이런 대포 덕분에 조선 수군은 적이 배에 뛰어오르기 전에 멀리서 일본 배를 부술 수 있었습니다.
징비록 (懲毖錄)
류성룡, 1604년경
🏛️ 한국국학진흥원, 안동
전쟁 동안 조선의 전시 행정을 이끈 영의정 류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 쓴 기록입니다. 제목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남긴 기록'이라는 뜻으로, 1592년 조선이 얼마나 준비가 없었는지를 숨김없이 적었습니다.
난중일기 (亂中日記)
이순신, 1592~1598년
🏛️ 현충사, 아산
이순신이 전쟁 7년 동안 거의 매일 직접 쓴 일기입니다. 함대의 이동, 날씨, 부족한 군량, 개인적인 걱정까지 적혀 있어서, 지휘관이 전쟁 중에 남긴 보기 드문 기록으로 꼽힙니다.
평양성탈환도 병풍
미상, 18~19세기
🏛️ 국립중앙박물관 등
1593년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병풍으로, 당시 공성전과 화포 운용 양상을 시각적으로 잘 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