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도
글꼴 크기
언어
테마

Loading Map...

Map height
Scroll Sensitivity1.0
1351년 – 1388년

원의 멸망과 명의 건국

황하 -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자 고대 중국 문명의 요람(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라나는 근원지)입니다. 강물이 싣고 온 비옥한 황토 덕분에 일찍부터 농경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래와 흙이 쌓여 강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역사적으로 수없이 범람(물이 흘러 넘침)하여 엄청난 수해를 입혔기 때문에 '중국의 슬픔'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황하의 물길을 잘 다스리는 것(치수)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가 과제였습니다.의 큰 홍수와 물가 폭등으로 흔들리던 원에서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시작된 전쟁입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주원장 -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다가 반란군에 들어가 황제까지 오른 인물로, 1368년 명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했습니다.이 반란군 가운데 승자가 되어 1368년 명을 세웠고, 같은 해 명군이 대도 - 대도는 쿠빌라이 칸이 1267년부터 지은 원의 수도로,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있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칸의 도시'라는 뜻으로 칸발리크라고 불렀습니다.바둑판처럼 반듯한 길과 네모난 성벽을 갖춘 계획도시였고, 대운하를 도시까지 끌어들여 남쪽의 곡식을 배로 실어 올 수 있게 했습니다. 초원의 지배자가 중국식 수도를 세운 셈입니다.마르코 폴로가 다녀갔다고 전하는 도시가 바로 이곳입니다. 1368년 명군이 다가오자 원의 마지막 황제는 이 도시를 버리고 초원으로 떠났고, 명은 이름을 북평으로 바꾸었다가 뒷날 다시 베이징이라 했습니다.를 차지하자 - 쿠빌라이 칸이 세운 몽골-중국 제국으로,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아 중국 전체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조정은 몽골 초원으로 물러나 북원 - 명에게 대도를 빼앗긴 원의 조정이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이어 간 나라입니다.으로 남았습니다.

위치중국 (황하 -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자 고대 중국 문명의 요람(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라나는 근원지)입니다. 강물이 싣고 온 비옥한 황토 덕분에 일찍부터 농경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래와 흙이 쌓여 강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역사적으로 수없이 범람(물이 흘러 넘침)하여 엄청난 수해를 입혔기 때문에 '중국의 슬픔'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황하의 물길을 잘 다스리는 것(치수)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가 과제였습니다.양쯔강 - 양쯔강 혹은 장강(長江)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중국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 강은 '천험의 요새'라고 불리며 북조의 강력한 기병대가 남하하는 것을 막아주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589년 수나라가 거대한 함대를 앞세워 이 강을 도하하기 전까지 장강은 남조 왕조들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유역, 대도 - 대도는 쿠빌라이 칸이 1267년부터 지은 원의 수도로,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있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칸의 도시'라는 뜻으로 칸발리크라고 불렀습니다.바둑판처럼 반듯한 길과 네모난 성벽을 갖춘 계획도시였고, 대운하를 도시까지 끌어들여 남쪽의 곡식을 배로 실어 올 수 있게 했습니다. 초원의 지배자가 중국식 수도를 세운 셈입니다.마르코 폴로가 다녀갔다고 전하는 도시가 바로 이곳입니다. 1368년 명군이 다가오자 원의 마지막 황제는 이 도시를 버리고 초원으로 떠났고, 명은 이름을 북평으로 바꾸었다가 뒷날 다시 베이징이라 했습니다., 몽골 초원)
교전국원나라 - 쿠빌라이 칸이 세운 몽골-중국 제국으로,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아 중국 전체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대원, 몽골 제국의 동쪽 계승 국가), 홍건적 - 홍건적은 1351년 원에 맞서 일어난 반란군입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 때문에 붉을 홍, 두건 건을 써서 홍건적이라 불렸습니다.이들은 백련교라는 신앙을 따랐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새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믿음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붉은색은 그 믿음의 표식이었습니다.홍건적은 하나로 통솔되는 군대가 아니라 여러 무리의 느슨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싸웠고, 그 가운데 주원장이 이겨 명을 세웠습니다. 등 반란군, 주원장 -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다가 반란군에 들어가 황제까지 오른 인물로, 1368년 명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했습니다. 세력 (1368년부터 명나라 - 1368년 태조 주원장이 몽골의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통일 제국을 재건한 동아시아의 대제국입니다.), 북원 - 명에게 대도를 빼앗긴 원의 조정이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이어 간 나라입니다.

배경 및 맥락

14세기

미륵이 온다는 믿음

당시 민간에는 백련교 - 백련교는 본래 12세기 남송 시대에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불교의 한 갈래인 정토종을 바탕으로 만든 신앙 모임에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쉽게 부처의 이름을 부르며 착하게 살자는 평화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하지만 원나라 시대에 접어들어 탄압을 받으며 점차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변했고, 빛과 어둠의 대립을 믿는 마니교 등 여러 신앙과 섞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상이 캄캄한 혼란에 빠졌을 때 미륵불이 땅에 내려와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은 전염병과 기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파고들었습니다.이러한 구원의 약속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세상을 바꾸려는 비밀 결사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1351년 한산동과 유복통 등이 백련교 조직을 이용해 사람들을 모아 원나라에 맞서 봉기하면서, 백련교는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습니다.라는 신앙이 퍼져 있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새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이었다. 반란군이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홍건적 - 홍건적은 1351년 원에 맞서 일어난 반란군입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 때문에 붉을 홍, 두건 건을 써서 홍건적이라 불렸습니다.이들은 백련교라는 신앙을 따랐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새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믿음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붉은색은 그 믿음의 표식이었습니다.홍건적은 하나로 통솔되는 군대가 아니라 여러 무리의 느슨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싸웠고, 그 가운데 주원장이 이겨 명을 세웠습니다.이라 불렸는데, 붉은색은 이 믿음의 표식이었다. 굶주림과 믿음이 만나 반란은 빠르게 번졌다.

14세기 중반

물 위에서 갈리는 승부

중국 남부는 강과 호수가 그물처럼 얽힌 땅이라, 이 시기의 큰 싸움은 대부분 배 위에서 벌어졌다. 누가 양쯔강 - 양쯔강 혹은 장강(長江)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중국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 강은 '천험의 요새'라고 불리며 북조의 강력한 기병대가 남하하는 것을 막아주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589년 수나라가 거대한 함대를 앞세워 이 강을 도하하기 전까지 장강은 남조 왕조들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의 물길을 쥐느냐가 곧 곡식과 병력을 옮길 수 있느냐를 결정했다. 초원의 기병으로 천하를 얻은 원이 정작 남쪽의 수전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14세기

유라시아를 함께 덮친 위기

이 시기 원만 흔들린 것이 아니다. 서쪽의 일 칸국은 1335년에 무너졌고, 킵차크 칸국도 곧 오랜 내분에 빠졌다. 기후가 나빠지고 흑사병이 대륙을 오가는 길을 따라 퍼지면서, 몽골이 세운 네 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위기를 맞았다.

전개 과정

원은 쿠빌라이가 세운 뒤 100년 가까이 중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서며 제국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배층의 분열이었다. 40년 동안 황제가 아홉 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중앙 조정은 지방을 통제할 힘을 완전히 잃었다. 게다가 과거 초원을 누비던 몽골 기병들은 오랜 평화와 사치 속에 싸우는 법을 잊고 약해져 있었다. 경제도 최악이었다.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지폐인 교초 - 교초는 원이 널리 사용한 지폐입니다.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에 도장을 찍어 만들었고, 원은 금이나 은 대신 이 종이돈을 나라의 기본 화폐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지폐만으로 물건을 사고판 것은 당시 세계에서 드문 일이었습니다.문제는 나라 살림이 모자랄 때마다 새 지폐를 더 찍어 냈다는 점입니다. 돈의 양이 늘어나면 돈 한 장의 값어치는 떨어집니다. 그래서 물건값이 크게 오르고 사람들은 지폐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값이 떨어진 지폐로 세금을 걷고 봉급을 주다 보니 관리도 군인도 살기 어려워졌고, 이는 원이 무너지는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를 마구 찍어낸 탓에 물가가 치솟았고, 관리와 군인들조차 월급이 종잇조각이 되자 백성들을 쥐어짜며 부패했다. 여기에 전염병과 가뭄이 겹치고 황하 -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자 고대 중국 문명의 요람(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라나는 근원지)입니다. 강물이 싣고 온 비옥한 황토 덕분에 일찍부터 농경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래와 흙이 쌓여 강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역사적으로 수없이 범람(물이 흘러 넘침)하여 엄청난 수해를 입혔기 때문에 '중국의 슬픔'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황하의 물길을 잘 다스리는 것(치수)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가 과제였습니다.마저 물길을 바꾸며 넓은 땅을 집어삼키자, 철저한 신분 차별 속에 억눌려 살던 남쪽 백성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원나라 - 쿠빌라이 칸이 세운 몽골-중국 제국으로,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아 중국 전체를 다스린 나라입니다.가 스스로를 지킬 힘을 잃어버린 1351년, 조정이 황하를 되돌리려고 15만 명을 공사장에 가혹하게 몰아넣자 마침내 굶주린 사람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반란이 터져 나왔다.

황하 제방 수리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이 붉은 두건을 두르고 원나라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
황하 제방 수리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이 붉은 두건을 두르고 원나라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있다.

붉은 두건을 두른 홍건적 - 홍건적은 1351년 원에 맞서 일어난 반란군입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 때문에 붉을 홍, 두건 건을 써서 홍건적이라 불렸습니다.이들은 백련교라는 신앙을 따랐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새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믿음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붉은색은 그 믿음의 표식이었습니다.홍건적은 하나로 통솔되는 군대가 아니라 여러 무리의 느슨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싸웠고, 그 가운데 주원장이 이겨 명을 세웠습니다.은 순식간에 중국 북쪽과 양쯔강 - 양쯔강 혹은 장강(長江)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중국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 강은 '천험의 요새'라고 불리며 북조의 강력한 기병대가 남하하는 것을 막아주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589년 수나라가 거대한 함대를 앞세워 이 강을 도하하기 전까지 장강은 남조 왕조들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가운데 지역으로 퍼졌다. 원의 군대는 곳곳에서 반란군을 깨뜨렸지만, 조정에서는 황제를 도와 나라 살림을 이끄는 자리인 승상을 두고 신하들이 편을 갈라 싸우느라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진압한 자리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는 사이, 남쪽에서는 반란군끼리 서로를 정리하는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절에서 지내던 주원장 -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다가 반란군에 들어가 황제까지 오른 인물로, 1368년 명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했습니다.은 1352년 홍건적에 들어가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1356년에는 집경 - 집경은 지금의 중국 난징입니다. 원나라 때 이 도시를 집경로라고 불렀습니다. 그전에는 금릉, 건강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왕조의 도읍 노릇을 했습니다.양쯔강을 등지고 세 방향을 산이 둘러싼 자리라 지키기에 좋았고, 강남의 곡식이 모이는 길목이기도 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런 지형을 두고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땅이라고 불렀습니다.이 도시에는 오래된 전설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옛날 이곳에 임금이 날 기운이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초나라 임금이 그 기운을 누르려고 땅에 금을 묻었다고 합니다. 금을 묻은 언덕이라는 뜻의 금릉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뒷날 진시황도 같은 기운을 끊으려고 산을 깎아 물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물길이 지금도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친화이허라고 합니다.1356년 주원장이 양쯔강을 건너 이 성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성 이름을 응천부로 고쳤고, 곡식이 넉넉한 강남을 등에 업으면서 여러 반란 세력 가운데 가장 안정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12년 뒤 이곳은 명나라의 첫 수도가 됩니다.(지금의 난징, 삼국지에서 손권이 도읍으로 삼은 건업)을 손에 넣어 근거지로 삼았다.

1363년 여름, 주원장은 파양호 - 중국 장시성에 위치한 파양호(포양호)는 중국 최대의 담수호입니다. 원나라 말기인 1363년,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큰 수전 중 하나인 파양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주원장은 진우량의 거대한 함대를 물리치고 장강(양쯔강) 유역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명나라 건국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에서 진우량 -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홍건적에서 힘을 키운 뒤 스스로 황제라 칭했고, 거대한 함대로 양쯔강 중류를 장악했습니다.과 맞붙었다. 진우량의 함대는 커다란 누선 - 누선은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던 여러 층으로 된 거대한 군함으로, 그 크기와 위용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성과 같아 '수상 요새'라고도 불렸습니다. 특히 280년 진나라(서진)가 오나라를 정복할 때 왕준 장군이 만든 누선은 길이가 120보(약 180미터)에 달했고, 한 척에 2,000명 이상의 군사를 태울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배 위에는 진짜 성벽과 성문, 망루가 세워져 있었으며, 심지어 갑판 위에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이 움직이는 요새들은 오나라가 양쯔강에 설치한 거대한 쇠사슬 방어선을 화공으로 무너뜨리며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을 쇠사슬로 이어 물 위의 성처럼 만들었지만, 주원장은 작고 빠른 배에 마른 갈대와 화약을 싣고 바람을 타 불을 질렀다. 한 달 넘게 이어진 이 싸움에서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남쪽의 주인은 정해졌다. 이어 1367년에는 소금 장사로 부를 쌓은 장사성 - 소금을 나르던 인부에서 몸을 일으켜 쑤저우 일대의 가장 부유한 땅을 다스린 인물로, 주원장·진우량과 함께 원 말기의 세 세력을 이루었습니다.의 근거지 평강 - 평강은 지금의 중국 쑤저우입니다. 춘추 시대 오나라의 도읍 고소에서 시작해 250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켜 온 도시로, 원나라 때에는 평강로라고 불렸습니다.양쯔강 하류의 물길과 대운하가 만나는 자리에 있어 배로 곡식과 비단을 실어 나르기 좋았습니다. 도시 안에도 물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서, 길을 걷는 대신 배를 타고 집 앞까지 가는 풍경이 흔했습니다. 이렇게 물길이 많아 뒷날 사람들은 이곳을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비단을 짜는 솜씨로도 이름이 높아,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꼽혔습니다.원나라 말기에는 소금 인부 출신의 장사성이 이곳을 차지하고 오왕이라 칭했습니다. 1366년 겨울부터 주원장의 군대가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먹을 것이 들어가는 길을 끊었고, 열 달을 버틴 끝에 1367년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로써 강남의 반란 세력은 주원장 한 사람에게 모였습니다.성이 무너진 뒤 주원장은 이 도시에 유난히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고 전합니다. 끝까지 장사성 편에서 버틴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해졌습니다.'평강'이라는 이름을 남긴 것 가운데 유명한 것이 평강도입니다. 1229년 돌에 새긴 이 도시 지도에는 성벽과 물길, 다리와 절이 촘촘히 그려져 있어, 800년 전 도시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지금의 쑤저우, 삼국지의 오군)까지 함락되었다.

주원장의 결정적 승리: 파양호에서 화공으로 진우량의 함대를 물리치고 (좌), 장사성의 근거지인 평강을 함락시키는 모습 (우).
주원장의 결정적 승리: 파양호에서 화공으로 진우량의 함대를 물리치고 (좌), 장사성의 근거지인 평강을 함락시키는 모습 (우).

1368년 음력 1월(정월) 주원장은 응천부 - 응천부는 주원장이 1356년 집경을 차지한 뒤 새로 붙인 이름으로, 지금의 중국 난징입니다. 응천은 하늘의 뜻에 응한다는 뜻입니다. 아직 황제가 아니던 시절부터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데서 그가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1368년 정월 주원장은 이곳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명이라 했습니다. 응천부는 명의 첫 수도가 되었고, 1421년 영락제가 수도를 북쪽의 베이징으로 옮긴 뒤에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으로 남았습니다. 오늘날의 난징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왔습니다.주원장은 이 도시 둘레에 35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벽을 쌓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벽돌입니다. 벽돌마다 어느 지방에서 구웠는지, 감독한 관리와 구운 장인의 이름이 무엇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벽돌이 부실하면 누구 책임인지 바로 찾아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성벽에 붙어 있는 벽돌에서 그 이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도시 동쪽 산자락에는 주원장과 그의 아내 마황후가 함께 묻힌 명효릉이 있습니다. 무덤으로 가는 길에는 코끼리, 낙타, 사자 같은 돌짐승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에서 황제에 올라 나라 이름을 명이라 했다. 그해 서달 - 주원장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명의 여러 전투를 이끌었고, 1367년 북벌군을 맡아 대도를 손에 넣었습니다.과 상우춘이 이끄는 북벌군이 남북을 잇는 긴 물길인 대운하 - 대운하는 중국의 북쪽 끝 통주(지금의 베이징 근처)에서 남쪽 항저우까지 약 1,800킬로미터를 잇는, 사람이 판 물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장 오래된 운하입니다.중국의 큰 강들은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남쪽의 곡식을 북쪽으로 보내려면 배가 다닐 길이 따로 필요했습니다. 대운하는 황하, 회하, 양쯔강 같은 동서로 흐르는 강들을 남북으로 꿰어 하나로 이어 준 물길입니다. 수레로 옮기는 것보다 배로 옮기는 편이 훨씬 많이, 훨씬 싸게 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물길은 곧 나라의 곳간을 잇는 핏줄이었습니다.여러 시대에 걸쳐 조금씩 파던 물길을 하나로 이은 사람은 수나라 양제입니다. 7세기 초에 수백만 명을 동원한 이 큰 공사는 나라를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지만, 백성의 고생이 너무 커서 수나라가 일찍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양제가 용 모양으로 꾸민 배를 타고 이 운하를 내려갈 때, 비단으로 꼰 밧줄을 잡고 배를 끄는 사람들의 줄이 몇십 리나 이어졌다고 합니다.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은 수도 대도까지 곧장 닿도록 산둥을 가로지르는 새 물길을 파서 운하를 훨씬 짧게 만들었고, 이어 통혜하를 뚫어 남쪽에서 온 배가 대도 성안의 적수담까지 들어오게 했습니다. 통주는 그 앞에서 짐을 내리고 옮겨 싣던 고을이라, 이름부터 조운이 통하는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남쪽의 곡식이 대도의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1368년 서달과 상우춘이 이끄는 명의 북벌군이 대도로 올라갈 때 이 운하를 따라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곡식과 무기를 배로 실어 나르면서 군대가 굶지 않고 북쪽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대운하는 지금도 남쪽 구간에서 배가 다니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대도 - 대도는 쿠빌라이 칸이 1267년부터 지은 원의 수도로,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있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칸의 도시'라는 뜻으로 칸발리크라고 불렀습니다.바둑판처럼 반듯한 길과 네모난 성벽을 갖춘 계획도시였고, 대운하를 도시까지 끌어들여 남쪽의 곡식을 배로 실어 올 수 있게 했습니다. 초원의 지배자가 중국식 수도를 세운 셈입니다.마르코 폴로가 다녀갔다고 전하는 도시가 바로 이곳입니다. 1368년 명군이 다가오자 원의 마지막 황제는 이 도시를 버리고 초원으로 떠났고, 명은 이름을 북평으로 바꾸었다가 뒷날 다시 베이징이라 했습니다.를 압박했다. 당시 원 조정은 군벌들의 내전으로 대도를 지킬 믿을 만한 중앙군이 없었고, 남쪽의 식량 공급줄인 대운하가 끊겨 성 안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경 민족과 달리 성벽보다 사람과 군마의 보존을 중요하게 여겼던 원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 - 원의 마지막 황제로 35년 동안 자리를 지켰고, 1368년 명군이 다가오자 대도를 떠나 초원으로 물러나 북원을 이어 갔습니다.는 무리하게 성에서 버티다 포위당하는 대신, 기병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고향 초원으로 물러나는 전략적 후퇴를 택했다. 대도가 무너졌어도 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정은 초원에서 북원 - 명에게 대도를 빼앗긴 원의 조정이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이어 간 나라입니다.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고, 1372년에는 카라코룸으로 쳐들어간 명군을 크게 꺾기도 했다. 그러나 1388년 부이르호에서 북원의 대칸이 크게 패하고 목숨까지 잃으면서,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의 후손이 대칸 자리를 잇던 흐름은 끊겼고 몽골은 여러 세력으로 갈라져 다투게 되었다. 1206년 칭기즈 칸이 초원의 부족들을 하나로 모은 지 182년, 1279년 남송을 무너뜨리고 중국 전체를 손에 넣은 지 109년 만이었다. 한때 동쪽 바다에서 유럽의 문턱까지 호령하던 몽골의 시대가 이렇게 저물었다.

명나라 북벌군이 대운하를 따라 진군하며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압박하고 있다.
명나라 북벌군이 대운하를 따라 진군하며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압박하고 있다.

주요 사건

1344년 – 1351년

황하 -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자 고대 중국 문명의 요람(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라나는 근원지)입니다. 강물이 싣고 온 비옥한 황토 덕분에 일찍부터 농경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래와 흙이 쌓여 강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역사적으로 수없이 범람(물이 흘러 넘침)하여 엄청난 수해를 입혔기 때문에 '중국의 슬픔'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황하의 물길을 잘 다스리는 것(치수)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가 과제였습니다.의 범람과 물길을 되돌리는 대공사

📍백모 제방 (지금의 중국 산둥성 차오현 일대) (지도 보기)

1344년 백모 제방이 터지면서 황하 - 황하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자 고대 중국 문명의 요람(어떤 일이 일어나고 자라나는 근원지)입니다. 강물이 싣고 온 비옥한 황토 덕분에 일찍부터 농경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래와 흙이 쌓여 강바닥이 높아짐에 따라 역사적으로 수없이 범람(물이 흘러 넘침)하여 엄청난 수해를 입혔기 때문에 '중국의 슬픔'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황하의 물길을 잘 다스리는 것(치수)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가 과제였습니다.의 물길이 북쪽으로 쏠려, 산둥의 농토와 소금밭은 물론 대운하 - 대운하는 중국의 북쪽 끝 통주(지금의 베이징 근처)에서 남쪽 항저우까지 약 1,800킬로미터를 잇는, 사람이 판 물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장 오래된 운하입니다.중국의 큰 강들은 대부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남쪽의 곡식을 북쪽으로 보내려면 배가 다닐 길이 따로 필요했습니다. 대운하는 황하, 회하, 양쯔강 같은 동서로 흐르는 강들을 남북으로 꿰어 하나로 이어 준 물길입니다. 수레로 옮기는 것보다 배로 옮기는 편이 훨씬 많이, 훨씬 싸게 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물길은 곧 나라의 곳간을 잇는 핏줄이었습니다.여러 시대에 걸쳐 조금씩 파던 물길을 하나로 이은 사람은 수나라 양제입니다. 7세기 초에 수백만 명을 동원한 이 큰 공사는 나라를 하나로 묶는 데는 성공했지만, 백성의 고생이 너무 커서 수나라가 일찍 무너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양제가 용 모양으로 꾸민 배를 타고 이 운하를 내려갈 때, 비단으로 꼰 밧줄을 잡고 배를 끄는 사람들의 줄이 몇십 리나 이어졌다고 합니다.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은 수도 대도까지 곧장 닿도록 산둥을 가로지르는 새 물길을 파서 운하를 훨씬 짧게 만들었고, 이어 통혜하를 뚫어 남쪽에서 온 배가 대도 성안의 적수담까지 들어오게 했습니다. 통주는 그 앞에서 짐을 내리고 옮겨 싣던 고을이라, 이름부터 조운이 통하는 고을이라는 뜻입니다. 남쪽의 곡식이 대도의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1368년 서달과 상우춘이 이끄는 명의 북벌군이 대도로 올라갈 때 이 운하를 따라간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곡식과 무기를 배로 실어 나르면서 군대가 굶지 않고 북쪽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대운하는 지금도 남쪽 구간에서 배가 다니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 구간까지 잠겼다. 조정은 1351년 가로를 책임자로 삼아 인부 15만 명과 군사 2만 명을 동원해, 강을 옛 물길로 되돌려 회하와 합쳐 바다로 흐르게 하는 공사를 벌였다. 굶주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감독 아래 혹사당하자, 공사장은 반란을 조직하기 좋은 자리가 되었다.

1351년

홍건적의 난

📍영주 (지금의 중국 안후이성 푸양) (지도 보기)

한산동과 유복통은 백련교 - 백련교는 본래 12세기 남송 시대에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불교의 한 갈래인 정토종을 바탕으로 만든 신앙 모임에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쉽게 부처의 이름을 부르며 착하게 살자는 평화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하지만 원나라 시대에 접어들어 탄압을 받으며 점차 비밀스러운 조직으로 변했고, 빛과 어둠의 대립을 믿는 마니교 등 여러 신앙과 섞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상이 캄캄한 혼란에 빠졌을 때 미륵불이 땅에 내려와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은 전염병과 기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파고들었습니다.이러한 구원의 약속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세상을 바꾸려는 비밀 결사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1351년 한산동과 유복통 등이 백련교 조직을 이용해 사람들을 모아 원나라에 맞서 봉기하면서, 백련교는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습니다. 신도들을 모아 봉기를 준비했으나 계획이 새어 나가 한산동은 붙잡혔고, 유복통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영주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붉은 두건을 표식으로 삼아 홍건적 - 홍건적은 1351년 원에 맞서 일어난 반란군입니다.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 때문에 붉을 홍, 두건 건을 써서 홍건적이라 불렸습니다.이들은 백련교라는 신앙을 따랐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새 세상을 연다는 가르침이었는데,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믿음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붉은색은 그 믿음의 표식이었습니다.홍건적은 하나로 통솔되는 군대가 아니라 여러 무리의 느슨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을 무너뜨린 뒤에는 서로 싸웠고, 그 가운데 주원장이 이겨 명을 세웠습니다.이라 불렸다. 정규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작은 무리로 흩어져 관청과 곡식 창고를 치고 곡식을 나누어 주며 세를 불렸고, 반란은 몇 달 만에 중국 북부로 번졌다.

결과반란 확산
휴전 / 공백기 (5년)
1356년

주원장의 집경 점령

📍집경 (지금의 중국 난징, 삼국지의 건업) (지도 보기)

집경 - 집경은 지금의 중국 난징입니다. 원나라 때 이 도시를 집경로라고 불렀습니다. 그전에는 금릉, 건강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여러 왕조의 도읍 노릇을 했습니다.양쯔강을 등지고 세 방향을 산이 둘러싼 자리라 지키기에 좋았고, 강남의 곡식이 모이는 길목이기도 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런 지형을 두고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땅이라고 불렀습니다.이 도시에는 오래된 전설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옛날 이곳에 임금이 날 기운이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초나라 임금이 그 기운을 누르려고 땅에 금을 묻었다고 합니다. 금을 묻은 언덕이라는 뜻의 금릉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뒷날 진시황도 같은 기운을 끊으려고 산을 깎아 물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물길이 지금도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친화이허라고 합니다.1356년 주원장이 양쯔강을 건너 이 성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성 이름을 응천부로 고쳤고, 곡식이 넉넉한 강남을 등에 업으면서 여러 반란 세력 가운데 가장 안정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12년 뒤 이곳은 명나라의 첫 수도가 됩니다.은 강을 등지고 산이 둘러싼 요새 같은 성이라, 이곳을 쥐면 곡식이 넉넉한 강남을 지킬 수 있었다. 주원장 -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다가 반란군에 들어가 황제까지 오른 인물로, 1368년 명을 세워 중국을 다시 통일했습니다.은 배를 모아 양쯔강 - 양쯔강 혹은 장강(長江)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중국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 강은 '천험의 요새'라고 불리며 북조의 강력한 기병대가 남하하는 것을 막아주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589년 수나라가 거대한 함대를 앞세워 이 강을 도하하기 전까지 장강은 남조 왕조들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을 건넜고, 성 밖으로 나와 맞선 원 수비군이 무너지자 성안 병사들이 항복했다. 그는 약탈을 금하고 항복한 병사를 받아들이고 학자들에게 행정을 맡겼으며, 성 이름을 응천부 - 응천부는 주원장이 1356년 집경을 차지한 뒤 새로 붙인 이름으로, 지금의 중국 난징입니다. 응천은 하늘의 뜻에 응한다는 뜻입니다. 아직 황제가 아니던 시절부터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데서 그가 무엇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1368년 정월 주원장은 이곳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명이라 했습니다. 응천부는 명의 첫 수도가 되었고, 1421년 영락제가 수도를 북쪽의 베이징으로 옮긴 뒤에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으로 남았습니다. 오늘날의 난징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왔습니다.주원장은 이 도시 둘레에 35킬로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벽을 쌓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벽돌입니다. 벽돌마다 어느 지방에서 구웠는지, 감독한 관리와 구운 장인의 이름이 무엇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벽돌이 부실하면 누구 책임인지 바로 찾아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성벽에 붙어 있는 벽돌에서 그 이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도시 동쪽 산자락에는 주원장과 그의 아내 마황후가 함께 묻힌 명효릉이 있습니다. 무덤으로 가는 길에는 코끼리, 낙타, 사자 같은 돌짐승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지키고 있습니다.로 고쳤다. 뒷날 명의 첫 수도가 되는 곳이다.

결과주원장 승리
휴전 / 공백기 (7년)
1363년

파양호 대전

📍파양호 (지금의 중국 장시성) (지도 보기)

진우량 -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홍건적에서 힘을 키운 뒤 스스로 황제라 칭했고, 거대한 함대로 양쯔강 중류를 장악했습니다.이 대함대로 홍도성 - 홍도(洪都)는 오늘날 중국 장시성 난창(남창)시로, 당시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원나라 말기인 1363년, 주원장의 조카 주문정이 진우량의 거대한 함대와 대군의 포위 공격에 맞서 85일간 이 성을 굳건히 방어해냈습니다. 홍도성 방어전은 진우량 군대의 힘을 크게 소진시켰으며, 주원장이 구원군을 이끌고 도착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어 이후 파양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을 오래 포위하자 주원장이 구원에 나서며 두 세력이 파양호 - 중국 장시성에 위치한 파양호(포양호)는 중국 최대의 담수호입니다. 원나라 말기인 1363년, 이곳에서 역사상 가장 큰 수전 중 하나인 파양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결정적인 전투에서 주원장은 진우량의 거대한 함대를 물리치고 장강(양쯔강) 유역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명나라 건국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에서 맞붙었다. 진우량은 여러 층으로 망루를 올린 큰 배인 누선 - 누선은 고대 중국에서 사용되던 여러 층으로 된 거대한 군함으로, 그 크기와 위용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성과 같아 '수상 요새'라고도 불렸습니다. 특히 280년 진나라(서진)가 오나라를 정복할 때 왕준 장군이 만든 누선은 길이가 120보(약 180미터)에 달했고, 한 척에 2,000명 이상의 군사를 태울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이었습니다. 배 위에는 진짜 성벽과 성문, 망루가 세워져 있었으며, 심지어 갑판 위에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이 움직이는 요새들은 오나라가 양쯔강에 설치한 거대한 쇠사슬 방어선을 화공으로 무너뜨리며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들을 쇠사슬로 묶어 물 위의 성처럼 늘어세웠고, 주원장은 정면 충돌을 피해 작고 빠른 배에 마른 갈대와 화약을 실어 바람을 타고 불을 질렀다. 묶인 배들은 흩어지지 못한 채 불탔고,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양쯔강 중류가 주원장에게 넘어갔다.

결과주원장 승리
1366년 – 1367년

평강 함락과 장사성의 최후

📍평강 (지금의 중국 쑤저우, 삼국지의 오군) (지도 보기)

소금 장사로 부를 쌓은 장사성 - 소금을 나르던 인부에서 몸을 일으켜 쑤저우 일대의 가장 부유한 땅을 다스린 인물로, 주원장·진우량과 함께 원 말기의 세 세력을 이루었습니다.평강 - 평강은 지금의 중국 쑤저우입니다. 춘추 시대 오나라의 도읍 고소에서 시작해 250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켜 온 도시로, 원나라 때에는 평강로라고 불렸습니다.양쯔강 하류의 물길과 대운하가 만나는 자리에 있어 배로 곡식과 비단을 실어 나르기 좋았습니다. 도시 안에도 물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어서, 길을 걷는 대신 배를 타고 집 앞까지 가는 풍경이 흔했습니다. 이렇게 물길이 많아 뒷날 사람들은 이곳을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비단을 짜는 솜씨로도 이름이 높아,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꼽혔습니다.원나라 말기에는 소금 인부 출신의 장사성이 이곳을 차지하고 오왕이라 칭했습니다. 1366년 겨울부터 주원장의 군대가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먹을 것이 들어가는 길을 끊었고, 열 달을 버틴 끝에 1367년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로써 강남의 반란 세력은 주원장 한 사람에게 모였습니다.성이 무너진 뒤 주원장은 이 도시에 유난히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고 전합니다. 끝까지 장사성 편에서 버틴 데 대한 앙갚음이었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해졌습니다.'평강'이라는 이름을 남긴 것 가운데 유명한 것이 평강도입니다. 1229년 돌에 새긴 이 도시 지도에는 성벽과 물길, 다리와 절이 촘촘히 그려져 있어, 800년 전 도시의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의 두꺼운 성벽을 믿고 성안에서 버티는 쪽을 택했다. 주원장군은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열 달 가까이 먹을 것이 들어가는 길을 끊었다. 성이 무너지자 장사성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붙잡혀 응천부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죽었다. 강남의 반란 세력은 주원장 한 사람에게 모였다.

결과주원장 승리
1368년

명의 건국

📍응천부 (지금의 중국 난징, 삼국지의 건업) (지도 보기)

1368년 음력 1월 주원장은 응천부에서 황제에 올라 나라 이름을 명이라 하고, 황제가 다스리는 기간에 붙이는 이름인 연호를 홍무라 정했다. 그는 몽골식 옷차림과 관습을 금하고 옛 한족 왕조의 제도를 되살리겠다고 선언했다. 농민 출신이 황제가 된 것은 한 고조 유방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368년

대도 함락과 원 조정의 북상

📍대도 (지금의 중국 베이징, 삼국지의 유주 계현) (지도 보기)

서달 - 주원장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명의 여러 전투를 이끌었고, 1367년 북벌군을 맡아 대도를 손에 넣었습니다.과 상우춘의 북벌군은 남북을 잇는 물길인 대운하를 따라 북상하며 산둥과 허난을 차례로 확보해 옆구리와 보급로를 안전하게 다진 뒤 대도 - 대도는 쿠빌라이 칸이 1267년부터 지은 원의 수도로,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있었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칸의 도시'라는 뜻으로 칸발리크라고 불렀습니다.바둑판처럼 반듯한 길과 네모난 성벽을 갖춘 계획도시였고, 대운하를 도시까지 끌어들여 남쪽의 곡식을 배로 실어 올 수 있게 했습니다. 초원의 지배자가 중국식 수도를 세운 셈입니다.마르코 폴로가 다녀갔다고 전하는 도시가 바로 이곳입니다. 1368년 명군이 다가오자 원의 마지막 황제는 이 도시를 버리고 초원으로 떠났고, 명은 이름을 북평으로 바꾸었다가 뒷날 다시 베이징이라 했습니다.로 향했다. 당시 원 조정은 군벌들의 내전으로 대도를 지킬 중앙군이 없었고, 대운하가 끊겨 성 안의 식량마저 바닥난 상태였다. 유목 민족의 전통에 따라 성에 갇혀 죽는 대신 군사력을 보존하기로 결정한 토곤 테무르 - 원의 마지막 황제로 35년 동안 자리를 지켰고, 1368년 명군이 다가오자 대도를 떠나 초원으로 물러나 북원을 이어 갔습니다.는 문을 닫고 버티는 농성 대신 북문을 열고 고향인 초원으로 떠났다. 큰 싸움 없이 성이 넘어가면서 원의 중국 지배는 끝났다.

결과명 승리
휴전 / 공백기 (4년)
1372년

명의 카라코룸 원정 실패

📍카라코룸 부근 (지금의 몽골) (지도 보기)

명은 북원 - 명에게 대도를 빼앗긴 원의 조정이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이어 간 나라입니다.을 뿌리 뽑으려고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초원 깊숙이 보냈다. 북원의 장수 코케 테무르는 물러나는 척하며 명군을 사막 안쪽으로 끌어들인 뒤, 먹을 것과 무기를 나르는 길이 길게 늘어진 가운데 갈래를 쳤다. 큰 손실을 입은 명은 초원 정복을 포기하고 만리장성 - 중국의 역사적인 북방 국경을 따라 유라시아 초원의 다양한 유목 세력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조된 거대한 성곽 방어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진나라, 한나라, 그리고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해서 건설 및 보수되었습니다.이 거대한 성벽에 얽힌 가장 유명한 민담으로 '맹강녀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진나라 시기 가혹한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장성을 쌓다 숨진 남편의 소식을 들은 아내 맹강녀가 슬픔에 겨워 장성 밑에서 며칠 밤낮을 울부짖자, 그녀의 눈물과 통곡에 하늘이 감복하여 장성 수백 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 아래 묻혀 있던 남편의 유골이 드러났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만리장성은 거대한 문명의 방벽이자, 그 성벽을 쌓아 올리기 위해 희생된 수많은 민초들의 눈물이 서려 있는 복합적인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을 고쳐 쌓으며 국경을 지키는 쪽으로 돌아섰다.

결과북원 승리
휴전 / 공백기 (16년)
1388년

부이르호 전투

📍부이르호 (지금의 몽골 동부) (지도 보기)

북원이 초원에서 힘을 되찾고 국경을 자주 넘보자 명은 북원 조정 자체를 노렸다. 장수 남옥은 십오만 대군을 이끌고 물이 귀한 초원을 가로질러 북원이 겨울을 나던 진영을 기습했다. 대비하지 못한 북원군은 진을 갖추기도 전에 무너져 수만 명이 사로잡혔다. 대칸 토구스 테무르는 빠져나갔으나 얼마 뒤 몽골 안의 다른 세력에게 살해되었다.

결과명 승리

예술 및 유산

홍무제 초상

홍무제 초상

작자 미상 (궁정 화가), 14~15세기

🏛️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탁발승으로 떠돌던 시절을 거쳐 명을 세운 인물의 초상입니다. 그를 그린 그림은 위엄 있는 황제의 얼굴과, 턱이 길고 얽은 자국이 많은 얼굴 두 갈래로 전해지는데, 그 차이 자체가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원나라 지폐 (교초)

원나라 지폐 (교초)

원 관영 인쇄소, 13~14세기

🏛️ 중국국가박물관, 대영박물관 등

뽕나무 껍질 종이에 도장을 찍어 만든 이 종잇장이 제국 전체의 돈이었습니다. 나라 살림이 모자랄 때마다 더 찍어 내면서 값이 떨어졌고, 이 종이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이 왕조의 끝으로 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난징 명 성벽

난징 명 성벽

명나라 축성 장인들, 1366~1393년

🏛️ 중국 난징 (현지 보존)

주원장이 수도 둘레에 쌓은 성벽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벽돌마다 가마와 감독관, 만든 사람의 이름이 찍혀 있어서 불량 벽돌을 만든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돌 위에서 읽을 수 있는 옛날식 품질 관리입니다.

관련 영상

자수성가의 끝판왕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

역사 퀴즈

1 / 5

홍건적의 난이 일어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