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은 하루아침에 터진 것이 아니라, 15세기 얀 후스 - 어려운 라틴어 대신 쉬운 우리말로 설교하며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일반 신도에게도 포도주를 나누어 주자고 주장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입니다. 화형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 훗날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와 16세기 마르틴 루터 - 1517년 교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져 물어 종교개혁의 문을 연 신학자로, 그가 시작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라짐이 100년 뒤 30년 전쟁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가 이끈 종교개혁의 흐름 속에서 깊어진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 1555년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1555년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맺어진 종교 평화 협정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제국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파(개신교의 한 갈래)가 40년 가까이 다투자, 황제와 제후들은 '각 영주가 자기 영지의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으로 다툼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라틴어로 '통치자의 종교가 그 땅의 종교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원칙입니다.이 협정 덕분에 제국은 반세기 넘게 큰 종교 전쟁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빈틈도 컸습니다. 루터파만 인정되었을 뿐 나중에 크게 퍼진 칼뱅파는 빠져 있었고, 백성 개인에게는 종교를 고를 자유가 없었으며, 성직자가 개신교로 바꾸면 교회 땅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애매하게 남겨 두었습니다.시간이 흐르며 이 빈틈들이 하나씩 문제가 되었고, 결국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는 밑불이 되었습니다.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 협정을 다시 확인하면서 칼뱅파까지 인정하는 것으로 빈틈을 메웠습니다.는 '영주가 자기 영지의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을 세워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다툼을 멈추고 50년 넘게 제국의 평화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나중에 세력을 넓힌 칼뱅파 개신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가톨릭 신부나 주교가 개신교로 종교를 바꿀 때 그가 다스리던 넓은 교회 땅과 재산을 그대로 가져가도 되는지 명확히 정하지 않아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수백 개의 영지로 나뉘어 영주마다 종교가 갈린 상태에서 이러한 빈틈과 불신이 60년 넘게 쌓이다가, 결국 1618년 보헤미아 - 보헤미아는 지금의 체코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입니다.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강이 프라하를 지나 엘베강으로 이어져, 예부터 중부 유럽의 교통과 상업 요지였습니다. 은광이 많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땅이기도 했습니다.보헤미아 국왕은 황제를 뽑는 선제후 일곱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 왕관은 제국 정치에서 특별히 무거운 의미를 지녔습니다. 다만 왕위는 아들에게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뽑는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 점이 1618년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보헤미아는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서 얀 후스가 교회 개혁을 외치다 화형당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후스파의 전통이 이어져 개신교 신앙이 뿌리 깊었고, 가톨릭 군주가 이를 되돌리려 하자 30년 전쟁의 첫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에서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꽃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1618년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서 황제가 보낸 관리들을 창밖으로 던지면서, 마침내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의 정면 싸움(개신교 대 가톨릭 전쟁)이 직접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 귀족들은 가톨릭을 강요하던 페르디난트 - 제국 안의 신앙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 한 황제로, 그의 강경한 종교 정책이 30년 전쟁을 일으키고 또 길게 만들었습니다.를 보헤미아 국왕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팔츠 선제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뽑을 권리를 가진 일곱 제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거로 황제를 뽑는 제후'라는 뜻이지요. 마인츠·쾰른·트리어 세 도시의 대주교와, 보헤미아 국왕·팔츠 궁정백·작센 공작·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황제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자동으로 물려받는 자리가 아니라 이 일곱 사람의 투표로 정해졌기 때문에, 선제후 한 명 한 명의 힘이 매우 컸습니다. 표를 얻으려는 후보는 선제후들에게 특권과 돈을 약속해야 했고, 이 때문에 황제의 힘은 늘 제한되어 있었습니다.30년 전쟁에서 선제후 자리는 그 자체가 큰 상이었습니다.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노렸다가 패하자 황제는 그의 선제후 자격을 빼앗아 바이에른 공작에게 넘겼고, 이 조치가 개신교 제후들을 크게 자극해 전쟁을 더 길게 만들었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 - 보헤미아 반란군이 내민 왕관을 받았다가 한 해 만에 모든 것을 잃어 '겨울왕'이라 불린 젊은 제후입니다.를 새 왕으로 세웠지만, 그에게는 군대도 돈도 없었습니다. 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 황제 자리에 올라 대군을 모은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로 밀고 들어왔고, 1620년 11월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은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망명길에 올라 '겨울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보헤미아는 자치권과 개신교 신앙을 함께 잃었습니다.
전쟁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이웃 나라들이 차례로 끼어들며 길어졌습니다. 1625년 덴마크-노르웨이 - 한 국왕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린 나라로, 발트해 입구의 해협을 지키며 통행료를 걷어 부유했습니다.의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지만, 황제 측의 사령관 발렌슈타인 - 자기 돈으로 10만 대군을 꾸려 황제에게 빌려준 사업가형 사령관으로, 너무 커진 힘 때문에 결국 황제에게 버림받았습니다.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황제 대신 자기 돈으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모은 뒤,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식량과 돈을 강제로 걷어 부대를 먹여 살리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이 대군 덕분에 거듭 승리하며 권력이 절정에 달하자, 황제는 1629년 '반환 칙령 - 1629년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발표한 명령입니다. 칙령이란 황제가 직접 내리는 명령을 뜻합니다. 내용은 1552년 이후 개신교 제후들이 차지한 교회 땅과 수도원을 모두 가톨릭 교회에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당시 황제는 발렌슈타인의 대군 덕분에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종교 문제를 한 번에 정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되돌려 줘야 할 땅에는 대주교구 두 곳과 주교구 열두 곳, 수백 개의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결과는 황제의 뜻과 반대였습니다. 개신교 제후들은 재산을 통째로 잃을 처지가 되어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가톨릭 제후들조차 황제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칙령은 스웨덴이 전쟁에 뛰어들 명분이 되었고, 결국 1635년 프라하 화약에서 사실상 취소되었습니다.'을 내렸습니다. 이는 지난 70여 년 동안 개신교 영주들이 차지했던 넓은 교회 땅과 수도원을 원래 주인인 가톨릭교회(가톨릭 성직자들)에 모두 강제로 돌려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오히려 적을 늘렸습니다. 재산을 통째로 잃게 된 개신교 제후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고, 가톨릭 제후들조차 황제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해 발렌슈타인의 해임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그때인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 얇고 빠른 전열과 가벼운 대포로 전쟁의 방식을 바꾼 스웨덴 왕으로, '북방의 사자'라 불리다 뤼첸에서 전사했습니다.가 프랑스의 자금을 등에 업고 독일 북부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보병 대열을 얇게 펴 더 많은 총이 한꺼번에 불을 뿜게 하고, 가벼운 대포를 보병과 함께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의 총사령관 틸리 - 가톨릭 동맹군을 이끌며 전반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노장이지만, 마그데부르크의 참극과 브라이텐펠트의 패배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백작을 크게 꺾었습니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다 전사했고, 1634년 뇌르틀링겐에서 스웨덴군이 크게 지면서 전세는 다시 뒤집혔습니다.
1635년 황제는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는 프라하 화약 - '화약(和約)'이란 총에 넣는 폭발물(火藥)이 아니라,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맺기로 약속한다'는 뜻의 역사 한자어로, 오늘날의 '평화 협정'을 뜻합니다.프라하 화약은 16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작센 선제후 등)이 체코 프라하에서 맺은 평화 협정입니다. 1629년에 내렸던 강경한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어들이고 개신교 제후들의 영토와 종교적 권리를 상당 부분 인정해 줌으로써 제국 내부의 다툼을 매듭짓고자 했습니다.황제와 독일 제후들이 서로 화해하면서 제국 안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이 하나로 뭉쳐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가톨릭 나라 프랑스가 개신교 나라 스웨덴과 손을 잡고 직접 전쟁에 뛰어들면서, 30년 전쟁은 이제 종교 전쟁을 넘어 유럽 강대국들의 거대한 세력 다툼으로 다시 번지게 되었습니다.을 맺어 제국 안의 다툼을 매듭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프랑스가 직접 참전하면서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가톨릭 나라인 프랑스가 개신교 나라인 스웨덴·네덜란드와 손잡고, 같은 가톨릭 세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 자리를 번갈아 차지하며 유럽을 다스린 가장 강력한 왕가(가문)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모두 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이었습니다.가문의 이름은 원래 스위스 북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작 루돌프의 조상이 산 위에서 매 한 마리가 숲속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성을 쌓아 '매의 성(독일어로 하비히츠부르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작은 시골 백작으로 시작한 이 가문은 정략결혼과 정복을 거쳐 유럽 전역을 다스리는 거대한 통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두 지역으로 나뉘어 유럽을 동서로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나라인 프랑스는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너무 강해져 자신들을 위협할까 봐 개신교 나라들의 편에 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서 싸웠습니다. 가문과 싸운 것입니다. 리슐리외 추기경 - 가톨릭 성직자이면서도 개신교 나라들을 도와 합스부르크를 견제한 프랑스 재상으로, 종교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운 외교의 상징입니다.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편이 같은 신앙인지가 아니라, 프랑스를 동서로 감싼 합스부르크 가문의 포위를 푸는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전쟁은 종교 전쟁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군대는 보급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지나가는 마을에서 곡식과 가축을 걷었고, 그 뒤에는 굶주림과 전염병이 따라왔습니다. 인구가 절반 아래로 줄어든 지역도 있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낸 평화 조약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한 양측을 위해 회담은 두 도시에서 따로 열렸습니다. 가톨릭 측은 뮌스터에서, 개신교 측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이야기했고, 전령들이 30킬로미터를 오가며 말을 전했습니다. 협상은 4년 넘게 이어졌습니다.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되살리되 칼뱅파도 인정했습니다. 둘째, 프랑스는 알자스 지역의 권리를, 스웨덴은 발트해 남쪽 항구들을 얻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셋째, 제국 안의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를 하고 동맹을 맺을 권리를 인정받아, 황제의 힘은 크게 줄었습니다.이 조약은 흔히 '주권 국가'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출발점으로 이야기됩니다. 나라마다 크기와 종교가 달라도 서로의 영토 안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유럽 외교의 기본 규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한 프랑스와 스웨덴은 새로운 영토를 얻었고, 네덜란드 공화국 -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 싸운 일곱 주의 연합체로, 왕 없이 상인들이 이끄는 나라이면서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들었습니다.과 스위스는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반면 제국을 하나로 묶어 다스리려던 황제(합스부르크 가문)의 야망은 꺾였습니다.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를 할 독립된 권리를 얻으면서 황제의 힘은 약해졌고, 서로의 영토 안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주권 국가'의 원칙이 유럽 외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