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도
글꼴 크기
언어
테마

Loading Map...

Map height
Scroll Sensitivity1.0
1618년 – 1648년

30년 전쟁

30년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 - 보헤미아는 지금의 체코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입니다.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강이 프라하를 지나 엘베강으로 이어져, 예부터 중부 유럽의 교통과 상업 요지였습니다. 은광이 많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땅이기도 했습니다.보헤미아 국왕은 황제를 뽑는 선제후 일곱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 왕관은 제국 정치에서 특별히 무거운 의미를 지녔습니다. 다만 왕위는 아들에게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뽑는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 점이 1618년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보헤미아는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서 얀 후스가 교회 개혁을 외치다 화형당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후스파의 전통이 이어져 개신교 신앙이 뿌리 깊었고, 가톨릭 군주가 이를 되돌리려 하자 30년 전쟁의 첫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의 반란으로 시작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낸 평화 조약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한 양측을 위해 회담은 두 도시에서 따로 열렸습니다. 가톨릭 측은 뮌스터에서, 개신교 측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이야기했고, 전령들이 30킬로미터를 오가며 말을 전했습니다. 협상은 4년 넘게 이어졌습니다.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되살리되 칼뱅파도 인정했습니다. 둘째, 프랑스는 알자스 지역의 권리를, 스웨덴은 발트해 남쪽 항구들을 얻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셋째, 제국 안의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를 하고 동맹을 맺을 권리를 인정받아, 황제의 힘은 크게 줄었습니다.이 조약은 흔히 '주권 국가'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출발점으로 이야기됩니다. 나라마다 크기와 종교가 달라도 서로의 영토 안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유럽 외교의 기본 규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으로 끝난, 근대 유럽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큰 전쟁입니다.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 안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맞선 종교 다툼이었지만, 덴마크-노르웨이 - 한 국왕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린 나라로, 발트해 입구의 해협을 지키며 통행료를 걷어 부유했습니다.스웨덴 왕국 - 발트해 북쪽의 왕국으로, 17세기에 뛰어난 군대와 철·구리 광산을 바탕으로 북유럽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왕국 - 프랑스 왕국은 서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위그 카페 즉위와 함께 탄생하여, 중세 서유럽 봉건제 사회의 중심이자 십자군 원정의 선두에 섰던 기독교 왕국입니다.이 차례로 뛰어들면서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 자리를 번갈아 차지하며 유럽을 다스린 가장 강력한 왕가(가문)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모두 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이었습니다.가문의 이름은 원래 스위스 북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작 루돌프의 조상이 산 위에서 매 한 마리가 숲속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성을 쌓아 '매의 성(독일어로 하비히츠부르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작은 시골 백작으로 시작한 이 가문은 정략결혼과 정복을 거쳐 유럽 전역을 다스리는 거대한 통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두 지역으로 나뉘어 유럽을 동서로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나라인 프랑스는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너무 강해져 자신들을 위협할까 봐 개신교 나라들의 편에 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서 싸웠습니다. 가문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강대국 다툼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전쟁터가 된 독일 지역은 인구의 다섯 명 중 한 명가량을 잃었고, 이 전쟁을 끝낸 평화 회담에서 오늘날 국제 질서의 바탕이 되는 주권 국가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위치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지금의 독일·체코 지역), 발트해 남쪽 연안 - 발트해는 북유럽 안쪽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바다입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지금의 스웨덴·노르웨이가 있는 큰 반도)와 유럽 대륙 사이에 끼어 있고, 큰 강물이 계속 흘러들어 바닷물의 짠맛이 옅은 편입니다. 그 가운데 남쪽 연안이란 바다 아래쪽 해안선, 곧 지금의 독일 북부에서 폴란드 북부로 이어지는 낮고 평평한 해변 지대를 말합니다. 서쪽부터 뤼베크·비스마르·로스토크·슈트랄준트가 늘어서고, 동쪽으로 가면 슈체친·코워브제크를 지나 그단스크에 이릅니다.이 연안은 중세부터 한자 동맹(북유럽 도시들이 무역을 지키려고 손잡은 상인 도시 연합)의 무대였습니다. 폴란드와 그 동쪽에서 거둔 곡식, 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목재와 밧줄 재료가 이곳 항구에 모여 서유럽으로 실려 나갔기 때문에, 항구를 쥔 쪽이 북유럽의 돈줄과 뱃길을 함께 쥐는 셈이었습니다.30년 전쟁에서 이 해안이 중요해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황제군의 사령관 발렌슈타인은 1628년 슈트랄준트를 포위해 바다로 나가는 길을 얻으려 했지만, 바닷길로 물자를 받는 도시를 끝내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2년 뒤인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 연안의 우제돔섬에 군대를 내려놓으며 전쟁에 뛰어들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스웨덴은 서포메른과 비스마르를 받아 남쪽 연안에 발판을 얻었습니다., 네덜란드 지역(지금의 네덜란드·벨기에), 프랑스 북부
교전국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황제군), 가톨릭 동맹, 에스파냐 왕국 -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왕국으로, 아메리카의 은과 최강으로 불린 테르시오 보병을 앞세워 한 세기 넘게 유럽을 이끌었습니다., 보헤미아 왕국 - 지금의 체코 땅에 있던 왕국으로, 국왕이 신성 로마 황제를 뽑는 선제후 자리를 가진 부유하고 중요한 나라였습니다.·개신교 제후들, 덴마크-노르웨이 - 한 국왕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린 나라로, 발트해 입구의 해협을 지키며 통행료를 걷어 부유했습니다., 스웨덴 왕국 - 발트해 북쪽의 왕국으로, 17세기에 뛰어난 군대와 철·구리 광산을 바탕으로 북유럽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왕국 - 프랑스 왕국은 서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위그 카페 즉위와 함께 탄생하여, 중세 서유럽 봉건제 사회의 중심이자 십자군 원정의 선두에 섰던 기독교 왕국입니다., 네덜란드 공화국 -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 싸운 일곱 주의 연합체로, 왕 없이 상인들이 이끄는 나라이면서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들었습니다.,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 30년 전쟁 시기 남부 저지대에 위치했던 가톨릭 영지로,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으며 북부 네덜란드 공화국 및 프랑스와 치열하게 대립했습니다.

배경 및 맥락

16세기

종교개혁이 갈라놓은 유럽

1517년 마르틴 루터 - 1517년 교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져 물어 종교개혁의 문을 연 신학자로, 그가 시작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라짐이 100년 뒤 30년 전쟁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가 교회의 잘못을 지적한 뒤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졌습니다. 특히 수백 개의 작은 나라로 이루어진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에서는 영주마다 신앙이 달라, 이웃한 두 마을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는 일이 흔했습니다.

16~17세기

군사 혁명 — 창에서 총으로

화승총과 대포가 널리 퍼지면서 전투의 주인공이 기사에서 보병으로 바뀌었습니다. 총을 다루는 훈련을 시키려면 군대를 오래 유지해야 했고, 그러려면 엄청난 돈이 들었습니다. 돈이 모자란 군주들은 용병 대장에게 병력을 통째로 빌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17세기

소빙기와 흉년

이 무렵 유럽의 기온이 눈에 띄게 내려가 여름이 짧고 서늘해졌습니다. 흉년이 잦아 곡식값이 오르고 사람들이 굶주렸는데, 그 위에 군대가 지나가며 남은 식량까지 걷어 가면서 전쟁의 피해가 몇 배로 커졌습니다.

17세기

은과 빚으로 굴러가던 전쟁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프랑스와 스웨덴은 세금과 빌린 돈으로 군대를 유지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병사를 사고, 그 병사가 점령한 지역에서 다시 돈을 걷는 구조여서, 전쟁이 스스로를 먹여 살리며 좀처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전개 과정

30년 전쟁은 하루아침에 터진 것이 아니라, 15세기 얀 후스 - 어려운 라틴어 대신 쉬운 우리말로 설교하며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일반 신도에게도 포도주를 나누어 주자고 주장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입니다. 화형당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아 훗날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와 16세기 마르틴 루터 - 1517년 교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져 물어 종교개혁의 문을 연 신학자로, 그가 시작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라짐이 100년 뒤 30년 전쟁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가 이끈 종교개혁의 흐름 속에서 깊어진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 1555년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1555년 신성 로마 제국의 도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맺어진 종교 평화 협정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제국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파(개신교의 한 갈래)가 40년 가까이 다투자, 황제와 제후들은 '각 영주가 자기 영지의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으로 다툼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라틴어로 '통치자의 종교가 그 땅의 종교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원칙입니다.이 협정 덕분에 제국은 반세기 넘게 큰 종교 전쟁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빈틈도 컸습니다. 루터파만 인정되었을 뿐 나중에 크게 퍼진 칼뱅파는 빠져 있었고, 백성 개인에게는 종교를 고를 자유가 없었으며, 성직자가 개신교로 바꾸면 교회 땅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애매하게 남겨 두었습니다.시간이 흐르며 이 빈틈들이 하나씩 문제가 되었고, 결국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는 밑불이 되었습니다.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 협정을 다시 확인하면서 칼뱅파까지 인정하는 것으로 빈틈을 메웠습니다.는 '영주가 자기 영지의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을 세워 가톨릭과 루터파 사이의 다툼을 멈추고 50년 넘게 제국의 평화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나중에 세력을 넓힌 칼뱅파 개신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가톨릭 신부나 주교가 개신교로 종교를 바꿀 때 그가 다스리던 넓은 교회 땅과 재산을 그대로 가져가도 되는지 명확히 정하지 않아 끊임없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수백 개의 영지로 나뉘어 영주마다 종교가 갈린 상태에서 이러한 빈틈과 불신이 60년 넘게 쌓이다가, 결국 1618년 보헤미아 - 보헤미아는 지금의 체코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입니다.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강이 프라하를 지나 엘베강으로 이어져, 예부터 중부 유럽의 교통과 상업 요지였습니다. 은광이 많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땅이기도 했습니다.보헤미아 국왕은 황제를 뽑는 선제후 일곱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 왕관은 제국 정치에서 특별히 무거운 의미를 지녔습니다. 다만 왕위는 아들에게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뽑는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 점이 1618년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보헤미아는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서 얀 후스가 교회 개혁을 외치다 화형당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후스파의 전통이 이어져 개신교 신앙이 뿌리 깊었고, 가톨릭 군주가 이를 되돌리려 하자 30년 전쟁의 첫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에서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불꽃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1618년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서 황제가 보낸 관리들을 창밖으로 던지면서, 마침내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의 정면 싸움(개신교 대 가톨릭 전쟁)이 직접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 귀족들은 가톨릭을 강요하던 페르디난트 - 제국 안의 신앙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 한 황제로, 그의 강경한 종교 정책이 30년 전쟁을 일으키고 또 길게 만들었습니다.를 보헤미아 국왕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팔츠 선제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뽑을 권리를 가진 일곱 제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거로 황제를 뽑는 제후'라는 뜻이지요. 마인츠·쾰른·트리어 세 도시의 대주교와, 보헤미아 국왕·팔츠 궁정백·작센 공작·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황제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자동으로 물려받는 자리가 아니라 이 일곱 사람의 투표로 정해졌기 때문에, 선제후 한 명 한 명의 힘이 매우 컸습니다. 표를 얻으려는 후보는 선제후들에게 특권과 돈을 약속해야 했고, 이 때문에 황제의 힘은 늘 제한되어 있었습니다.30년 전쟁에서 선제후 자리는 그 자체가 큰 상이었습니다.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노렸다가 패하자 황제는 그의 선제후 자격을 빼앗아 바이에른 공작에게 넘겼고, 이 조치가 개신교 제후들을 크게 자극해 전쟁을 더 길게 만들었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 - 보헤미아 반란군이 내민 왕관을 받았다가 한 해 만에 모든 것을 잃어 '겨울왕'이라 불린 젊은 제후입니다.를 새 왕으로 세웠지만, 그에게는 군대도 돈도 없었습니다. 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 황제 자리에 올라 대군을 모은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로 밀고 들어왔고, 1620년 11월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은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망명길에 올라 '겨울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보헤미아는 자치권과 개신교 신앙을 함께 잃었습니다.

전쟁은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이웃 나라들이 차례로 끼어들며 길어졌습니다. 1625년 덴마크-노르웨이 - 한 국왕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린 나라로, 발트해 입구의 해협을 지키며 통행료를 걷어 부유했습니다.의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지만, 황제 측의 사령관 발렌슈타인 - 자기 돈으로 10만 대군을 꾸려 황제에게 빌려준 사업가형 사령관으로, 너무 커진 힘 때문에 결국 황제에게 버림받았습니다.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황제 대신 자기 돈으로 10만이 넘는 대군을 모은 뒤,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마다 식량과 돈을 강제로 걷어 부대를 먹여 살리는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이 대군 덕분에 거듭 승리하며 권력이 절정에 달하자, 황제는 1629년 '반환 칙령 - 1629년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발표한 명령입니다. 칙령이란 황제가 직접 내리는 명령을 뜻합니다. 내용은 1552년 이후 개신교 제후들이 차지한 교회 땅과 수도원을 모두 가톨릭 교회에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당시 황제는 발렌슈타인의 대군 덕분에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종교 문제를 한 번에 정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되돌려 줘야 할 땅에는 대주교구 두 곳과 주교구 열두 곳, 수백 개의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결과는 황제의 뜻과 반대였습니다. 개신교 제후들은 재산을 통째로 잃을 처지가 되어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가톨릭 제후들조차 황제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칙령은 스웨덴이 전쟁에 뛰어들 명분이 되었고, 결국 1635년 프라하 화약에서 사실상 취소되었습니다.'을 내렸습니다. 이는 지난 70여 년 동안 개신교 영주들이 차지했던 넓은 교회 땅과 수도원을 원래 주인인 가톨릭교회(가톨릭 성직자들)에 모두 강제로 돌려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오히려 적을 늘렸습니다. 재산을 통째로 잃게 된 개신교 제후들은 물러설 곳이 없었고, 가톨릭 제후들조차 황제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해 발렌슈타인의 해임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그때인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 얇고 빠른 전열과 가벼운 대포로 전쟁의 방식을 바꾼 스웨덴 왕으로, '북방의 사자'라 불리다 뤼첸에서 전사했습니다.가 프랑스의 자금을 등에 업고 독일 북부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보병 대열을 얇게 펴 더 많은 총이 한꺼번에 불을 뿜게 하고, 가벼운 대포를 보병과 함께 움직이는 새로운 방식으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의 총사령관 틸리 - 가톨릭 동맹군을 이끌며 전반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노장이지만, 마그데부르크의 참극과 브라이텐펠트의 패배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백작을 크게 꺾었습니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돌격하다 전사했고, 1634년 뇌르틀링겐에서 스웨덴군이 크게 지면서 전세는 다시 뒤집혔습니다.

1635년 황제는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는 프라하 화약 - '화약(和約)'이란 총에 넣는 폭발물(火藥)이 아니라,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맺기로 약속한다'는 뜻의 역사 한자어로, 오늘날의 '평화 협정'을 뜻합니다.프라하 화약은 16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작센 선제후 등)이 체코 프라하에서 맺은 평화 협정입니다. 1629년에 내렸던 강경한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어들이고 개신교 제후들의 영토와 종교적 권리를 상당 부분 인정해 줌으로써 제국 내부의 다툼을 매듭짓고자 했습니다.황제와 독일 제후들이 서로 화해하면서 제국 안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이 하나로 뭉쳐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가톨릭 나라 프랑스가 개신교 나라 스웨덴과 손을 잡고 직접 전쟁에 뛰어들면서, 30년 전쟁은 이제 종교 전쟁을 넘어 유럽 강대국들의 거대한 세력 다툼으로 다시 번지게 되었습니다.을 맺어 제국 안의 다툼을 매듭지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프랑스가 직접 참전하면서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가톨릭 나라인 프랑스가 개신교 나라인 스웨덴·네덜란드와 손잡고, 같은 가톨릭 세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 자리를 번갈아 차지하며 유럽을 다스린 가장 강력한 왕가(가문)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모두 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이었습니다.가문의 이름은 원래 스위스 북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작 루돌프의 조상이 산 위에서 매 한 마리가 숲속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성을 쌓아 '매의 성(독일어로 하비히츠부르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작은 시골 백작으로 시작한 이 가문은 정략결혼과 정복을 거쳐 유럽 전역을 다스리는 거대한 통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두 지역으로 나뉘어 유럽을 동서로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나라인 프랑스는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너무 강해져 자신들을 위협할까 봐 개신교 나라들의 편에 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서 싸웠습니다. 가문과 싸운 것입니다. 리슐리외 추기경 - 가톨릭 성직자이면서도 개신교 나라들을 도와 합스부르크를 견제한 프랑스 재상으로, 종교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운 외교의 상징입니다.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편이 같은 신앙인지가 아니라, 프랑스를 동서로 감싼 합스부르크 가문의 포위를 푸는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전쟁은 종교 전쟁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대가를 치른 것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군대는 보급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지나가는 마을에서 곡식과 가축을 걷었고, 그 뒤에는 굶주림과 전염병이 따라왔습니다. 인구가 절반 아래로 줄어든 지역도 있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낸 평화 조약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한 양측을 위해 회담은 두 도시에서 따로 열렸습니다. 가톨릭 측은 뮌스터에서, 개신교 측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이야기했고, 전령들이 30킬로미터를 오가며 말을 전했습니다. 협상은 4년 넘게 이어졌습니다.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되살리되 칼뱅파도 인정했습니다. 둘째, 프랑스는 알자스 지역의 권리를, 스웨덴은 발트해 남쪽 항구들을 얻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셋째, 제국 안의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를 하고 동맹을 맺을 권리를 인정받아, 황제의 힘은 크게 줄었습니다.이 조약은 흔히 '주권 국가'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출발점으로 이야기됩니다. 나라마다 크기와 종교가 달라도 서로의 영토 안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유럽 외교의 기본 규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한 프랑스와 스웨덴은 새로운 영토를 얻었고, 네덜란드 공화국 -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 싸운 일곱 주의 연합체로, 왕 없이 상인들이 이끄는 나라이면서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들었습니다.과 스위스는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반면 제국을 하나로 묶어 다스리려던 황제(합스부르크 가문)의 야망은 꺾였습니다.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를 할 독립된 권리를 얻으면서 황제의 힘은 약해졌고, 서로의 영토 안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주권 국가'의 원칙이 유럽 외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주요 사건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 몰려가 황제가 보낸 관리 두 명과 서기 한 명을 회의실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린 사건입니다. 창밖은 약 20미터 높이였지만 세 사람은 성벽 아래 쌓여 있던 거름 더미에 떨어져 모두 살아남았습니다.이 일은 갑작스러운 화풀이가 아니었습니다. 보헤미아는 원래 개신교 신앙을 보장받고 있었는데, 새 국왕이 개신교 교회를 부수고 신앙의 자유를 좁히자 귀족들이 '왕의 나쁜 신하를 처벌한다'는 옛 방식대로 항의한 것입니다. 프라하에서는 1419년에도 비슷한 창문 투척 사건이 있었기에, 귀족들은 자기들이 전통을 따랐다고 주장했습니다.가톨릭 쪽은 세 사람이 살아남은 것을 두고 천사들이 받아 주었다고 이야기했고, 개신교 쪽은 그저 거름 더미 덕분이었다고 맞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30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라하 성 (지도 보기)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 회의실로 몰려가 황제가 보낸 관리 두 명과 서기를 20미터 아래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세 사람 모두 성벽 아래 거름 더미에 떨어져 살아남았습니다. 귀족들은 '왕의 나쁜 신하를 벌한다'는 옛 관습을 따랐다고 주장했지만, 황제 쪽은 이를 반역으로 보았고 보헤미아 - 보헤미아는 지금의 체코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입니다.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강이 프라하를 지나 엘베강으로 이어져, 예부터 중부 유럽의 교통과 상업 요지였습니다. 은광이 많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땅이기도 했습니다.보헤미아 국왕은 황제를 뽑는 선제후 일곱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 왕관은 제국 정치에서 특별히 무거운 의미를 지녔습니다. 다만 왕위는 아들에게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뽑는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 점이 1618년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보헤미아는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서 얀 후스가 교회 개혁을 외치다 화형당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후스파의 전통이 이어져 개신교 신앙이 뿌리 깊었고, 가톨릭 군주가 이를 되돌리려 하자 30년 전쟁의 첫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는 곧 임시 정부를 세워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620년

백산 전투

📍프라하 서쪽 백산(빌라 호라) (지도 보기)

보헤미아군 2만여 명은 완만한 언덕 위에 자리 잡았지만 봉급을 받지 못해 사기가 낮았고 방어 진지도 얕았습니다. 틸리 - 가톨릭 동맹군을 이끌며 전반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노장이지만, 마그데부르크의 참극과 브라이텐펠트의 패배로 기억되기도 합니다.가 이끈 비슷한 규모의 병력은 비탈을 정면으로 밀어 올렸고, 첫 충돌에서 보헤미아 기병이 밀리자 전열 전체가 두 시간도 못 되어 흩어졌습니다. 프라하는 곧 항복했고 보헤미아의 저항은 끝났습니다.

결과황제·가톨릭 동맹군 승리
휴전 / 공백기 (6년)
1626년

루터 전투

📍루터 암 바렌베르게 (지도 보기)

북독일로 남하하던 덴마크-노르웨이 - 한 국왕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함께 다스린 나라로, 발트해 입구의 해협을 지키며 통행료를 걷어 부유했습니다.군을 틸리가 따라잡았습니다. 덴마크군은 언덕과 숲에 의지해 방어선을 폈지만, 황제군이 대포로 전열을 흔든 뒤 세 차례 연이어 밀어붙이자 측면이 뚫렸습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전사자와 포로, 이탈자를 합쳐 절반 가까운 병력을 잃고 물러났고, 덴마크의 북독일 진출 시도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결과황제군 승리
1629년

반환 칙령 - 1629년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발표한 명령입니다. 칙령이란 황제가 직접 내리는 명령을 뜻합니다. 내용은 1552년 이후 개신교 제후들이 차지한 교회 땅과 수도원을 모두 가톨릭 교회에 돌려주라는 것이었습니다.당시 황제는 발렌슈타인의 대군 덕분에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종교 문제를 한 번에 정리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되돌려 줘야 할 땅에는 대주교구 두 곳과 주교구 열두 곳, 수백 개의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결과는 황제의 뜻과 반대였습니다. 개신교 제후들은 재산을 통째로 잃을 처지가 되어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가톨릭 제후들조차 황제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칙령은 스웨덴이 전쟁에 뛰어들 명분이 되었고, 결국 1635년 프라하 화약에서 사실상 취소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있던 페르디난트 2세 - 제국 안의 신앙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 한 황제로, 그의 강경한 종교 정책이 30년 전쟁을 일으키고 또 길게 만들었습니다.가 1552년 이후 개신교 제후들이 차지한 교회 땅을 모두 돌려주라고 명령했습니다. 대주교와 주교가 다스리던 교회 관할 지역 열네 곳과 수백 개의 수도원이 대상이었습니다. 개신교 제후들은 물러설 곳이 없어졌고, 황제의 힘을 경계한 가톨릭 제후들까지 등을 돌리면서 전쟁은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1631년

마그데부르크 함락

📍엘베강 가의 마그데부르크 (지도 보기)

황제군과 가톨릭 동맹군의 반년 가까운 포위 끝에 성벽 한쪽이 뚫렸고, 새벽에 들이닥친 황제군 병사들 앞에서 개신교 도시 마그데부르크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어진 무자비한 약탈 중에 불이 번져 도시가 거의 통째로 탔고, 3만 명 정도였던 시민 가운데 3분의 2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황제군의 무자비한 참극에 충격을 받은 개신교 제후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는 망설임을 끝내고 스웨덴 편에 섰습니다.

결과황제·가톨릭 동맹군 함락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

📍라이프치히 북쪽 브라이텐펠트 (지도 보기)

황제군은 두꺼운 네모 대형으로, 스웨덴군은 여섯 줄로 얇게 편 대열과 보병 사이에 끼워 넣은 가벼운 대포로 맞섰습니다. 왼쪽의 작센군이 무너지자 스웨덴군은 남은 부대를 빠르게 돌려 빈자리를 메우고 적의 옆구리를 쳤습니다. 틸리는 첫 큰 패배를 당했고, 스웨덴군은 독일 한복판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결과스웨덴·작센 연합군 승리
1632년

뤼첸 전투

📍라이프치히 서쪽 뤼첸 (지도 보기)

발렌슈타인 - 자기 돈으로 10만 대군을 꾸려 황제에게 빌려준 사업가형 사령관으로, 너무 커진 힘 때문에 결국 황제에게 버림받았습니다.은 도랑을 파고 길가에 총병을 늘어세워 방어선을 만들었고, 스웨덴군은 짙은 안개 속에서 돌격을 되풀이했습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 얇고 빠른 전열과 가벼운 대포로 전쟁의 방식을 바꾼 스웨덴 왕으로, '북방의 사자'라 불리다 뤼첸에서 전사했습니다.는 기병을 이끌다 부대와 떨어져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을 안 스웨덴군이 오히려 격렬하게 밀어붙여 저녁에는 황제군이 물러났습니다. 스웨덴은 이겼지만 대신할 수 없는 지휘자를 잃었습니다.

결과스웨덴군이 전장을 지켰으나 국왕 전사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

📍남부 독일 뇌르틀링겐 (지도 보기)

에스파냐에서 온, 가장 오래 훈련받은 테르시오 - 16~17세기 에스파냐 군대가 쓰던 보병 전투 대형입니다. 긴 창을 든 병사 수천 명이 네모난 덩어리로 빽빽하게 뭉쳐 서고, 그 네 귀퉁이에 화승총(불붙인 심지로 발사하는 총) 부대가 붙는 모양이었습니다. 창이 기병의 돌격을 막아 주는 동안 총이 적을 쏘았고, 총병이 총알을 채우는 사이에는 창병 덩어리 안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이 대형은 100년 넘게 유럽 최강으로 불렸습니다. 사방 어디서 공격받아도 방향만 바꾸면 되었고, 대형이 워낙 두꺼워 쉽게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덩치가 큰 만큼 움직임이 느리고, 한 번에 쏠 수 있는 총의 수가 적다는 약점도 있었습니다.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부대를 얇고 넓게 펴서 더 많은 총이 동시에 불을 뿜게 하고 대포를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에스파냐 테르시오가 프랑스군에게 무너지면서, 테르시오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부대가 언덕을 차지하고 진을 쳤습니다. 스웨덴·개신교 연합군은 이 언덕을 열다섯 차례나 밀어 올렸지만 창과 총이 겹겹이 버틴 대형을 뚫지 못했고, 지친 틈을 노린 반격에 전열이 무너졌습니다. 이 패배로 스웨덴은 남부 독일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프라하 화약 - '화약(和約)'이란 총에 넣는 폭발물(火藥)이 아니라,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맺기로 약속한다'는 뜻의 역사 한자어로, 오늘날의 '평화 협정'을 뜻합니다.프라하 화약은 163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작센 선제후 등)이 체코 프라하에서 맺은 평화 협정입니다. 1629년에 내렸던 강경한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어들이고 개신교 제후들의 영토와 종교적 권리를 상당 부분 인정해 줌으로써 제국 내부의 다툼을 매듭짓고자 했습니다.황제와 독일 제후들이 서로 화해하면서 제국 안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이 하나로 뭉쳐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가톨릭 나라 프랑스가 개신교 나라 스웨덴과 손을 잡고 직접 전쟁에 뛰어들면서, 30년 전쟁은 이제 종교 전쟁을 넘어 유럽 강대국들의 거대한 세력 다툼으로 다시 번지게 되었습니다.이 맺어졌습니다.

결과황제·에스파냐 연합군 승리
1635년

프라하 화약과 프랑스의 참전

📍프라하 (지도 보기)

황제는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고 작센을 비롯한 개신교 제후들과 화해했습니다. 제국 안의 종교 다툼은 이것으로 가라앉았지만, 같은 해 프랑스가 에스파냐에 전쟁을 하겠다고 공식으로 선언하고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가톨릭 나라가 개신교 편에 선 것입니다. 이때부터 전쟁은 신앙의 다툼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백 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국왕 자리를 번갈아 차지하며 유럽을 다스린 가장 강력한 왕가(가문)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모두 이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이었습니다.가문의 이름은 원래 스위스 북부에 있는 '합스부르크 성'에서 유래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작 루돌프의 조상이 산 위에서 매 한 마리가 숲속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성을 쌓아 '매의 성(독일어로 하비히츠부르크)'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작은 시골 백작으로 시작한 이 가문은 정략결혼과 정복을 거쳐 유럽 전역을 다스리는 거대한 통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두 지역으로 나뉘어 유럽을 동서로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나라인 프랑스는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졌음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너무 강해져 자신들을 위협할까 봐 개신교 나라들의 편에 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맞서 싸웠습니다.와 프랑스의 힘겨루기가 되었습니다.

휴전 / 공백기 (8년)
1643년

로크루아 전투

📍프랑스 북부 로크루아 (지도 보기)

숲과 늪에 둘러싸인 좁은 벌판에서 스물한 살의 앙기앵 공작이 오른쪽 기병을 이끌고 적의 측면을 돌아 후방의 대포를 빼앗았습니다. 빼앗은 대포를 에스파냐 테르시오 대형에 정면으로 쏘아 대자, 100년 넘게 무너지지 않던 창병 덩어리가 처음으로 흩어졌습니다. 유럽은 이 소식을 에스파냐 시대가 저무는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과프랑스군 승리
휴전 / 공백기 (5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낸 평화 조약입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한 양측을 위해 회담은 두 도시에서 따로 열렸습니다. 가톨릭 측은 뮌스터에서, 개신교 측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이야기했고, 전령들이 30킬로미터를 오가며 말을 전했습니다. 협상은 4년 넘게 이어졌습니다.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되살리되 칼뱅파도 인정했습니다. 둘째, 프랑스는 알자스 지역의 권리를, 스웨덴은 발트해 남쪽 항구들을 얻었고, 스위스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이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셋째, 제국 안의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를 하고 동맹을 맺을 권리를 인정받아, 황제의 힘은 크게 줄었습니다.이 조약은 흔히 '주권 국가'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출발점으로 이야기됩니다. 나라마다 크기와 종교가 달라도 서로의 영토 안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때부터 유럽 외교의 기본 규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지도 보기)

서로 마주 앉기를 거부한 양측을 위해 회담은 두 도시에서 따로 열렸고, 전령들이 30킬로미터를 오가며 4년 넘게 조건을 다듬었습니다. 칼뱅파가 인정되고, 프랑스는 알자스의 권리를, 스웨덴은 발트해 - 발트해는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럽 대륙 사이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아늑한 안바다(내해)입니다. 오늘날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 러시아 등의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강에서 차가운 민물이 대량으로 흘러들고 지중해처럼 입구가 좁아서, 다른 바다보다 바닷물의 짠맛(염도)이 훨씬 옅은 것이 특징입니다.발트해 연안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바다 깊은 곳에는 순수한 호박(보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해저 궁전에 바다의 여신 유라테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라테 여신이 인간 어부 청년과 사랑에 빠지자, 이에 분노한 하늘과 천둥의 신 페르쿠나스가 벼락을 내려 해저 궁전을 산산조각 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파도가 칠 때마다 발트해 해변으로 밀려오는 노란 호박 보석 조각들은 그때 부서진 해저 궁전의 파편이자 여신의 눈물이라고 전해집니다.역사적으로 발트해는 북유럽 무역과 교통의 핵심 요지였습니다. 중세에는 한자 동맹 상인들이 이 바다를 오가며 모피, 목재, 곡물, 소금을 실어 날랐고, 17세기 스웨덴은 발트해 해안선을 둘러싸고 영토를 넓혀 '발트해의 패자'로 올라섰습니다. 30년 전쟁에서도 스웨덴군이 발트해를 건너 독일 북부에 상륙하면서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남쪽 항구를 얻었으며, 스위스와 네덜란드 공화국 -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 싸운 일곱 주의 연합체로, 왕 없이 상인들이 이끄는 나라이면서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들었습니다.의 독립이 확인되었습니다. 제후들이 스스로 외교할 권리도 인정되었습니다.

예술 및 유산

전쟁의 참화 (대형 연작)

전쟁의 참화 (대형 연작)

자크 칼로, 1633년

🏛️ 프랑스 국립도서관, 파리

군대가 지나간 마을에서 벌어진 약탈과 처형을 열여덟 장의 동판화로 담은 연작입니다. 영웅적인 장면 대신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린 최초의 반전 미술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판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판화

마테우스 메리안 공방, 17세기

🏛️ 여러 도서관 소장 (테아트룸 에우로파에움 삽화)

당시 유럽의 소식을 그림과 함께 전한 연대기 '테아트룸 에우로파에움'에 실린 판화입니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관리들의 모습이 담겨,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화제였는지 보여 줍니다.

뤼첸 전투에서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

뤼첸 전투에서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

칼 발봄, 1855년

🏛️ 스웨덴 국립미술관, 스톡홀름

안개 속에서 말에서 떨어진 스웨덴 왕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19세기 작품입니다. 사건이 있고 200년 넘게 지난 뒤에도 그의 죽음이 스웨덴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보여 줍니다.

뮌스터 조약의 비준

뮌스터 조약의 비준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 1648년

🏛️ 내셔널 갤러리, 런던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대표들이 손을 들어 조약을 맹세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본 화가가 그렸습니다. 8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담은 기록화입니다.

관련 영상

[#벌거벗은세계사] 최초의 세계대전 30년 전쟁❗ 로마 가톨릭 🆚 신교 종교 전쟁의 서막

역사 퀴즈

1 / 6

30년 전쟁이 시작된 계기가 된 1618년의 사건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