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보헤미아 - 보헤미아는 지금의 체코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지역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입니다.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강이 프라하를 지나 엘베강으로 이어져, 예부터 중부 유럽의 교통과 상업 요지였습니다. 은광이 많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땅이기도 했습니다.보헤미아 국왕은 황제를 뽑는 선제후 일곱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 왕관은 제국 정치에서 특별히 무거운 의미를 지녔습니다. 다만 왕위는 아들에게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뽑는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 점이 1618년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보헤미아는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서 얀 후스가 교회 개혁을 외치다 화형당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후스파의 전통이 이어져 개신교 신앙이 뿌리 깊었고, 가톨릭 군주가 이를 되돌리려 하자 30년 전쟁의 첫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왕국은 지금의 체코 서쪽 지역에 자리 잡았던 나라로, 12세기 말부터 왕국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한가운데를 블타바강이 흘렀고, 그 강가에 수도 프라하가 있었습니다.
은광에서 나오는 은 덕분에 중부 유럽에서 손꼽히게 부유했고,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의 선제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뽑을 권리를 가진 일곱 제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선거로 황제를 뽑는 제후'라는 뜻이지요. 마인츠·쾰른·트리어 세 도시의 대주교와, 보헤미아 국왕·팔츠 궁정백·작센 공작·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황제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자동으로 물려받는 자리가 아니라 이 일곱 사람의 투표로 정해졌기 때문에, 선제후 한 명 한 명의 힘이 매우 컸습니다. 표를 얻으려는 후보는 선제후들에게 특권과 돈을 약속해야 했고, 이 때문에 황제의 힘은 늘 제한되어 있었습니다.30년 전쟁에서 선제후 자리는 그 자체가 큰 상이었습니다.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노렸다가 패하자 황제는 그의 선제후 자격을 빼앗아 바이에른 공작에게 넘겼고, 이 조치가 개신교 제후들을 크게 자극해 전쟁을 더 길게 만들었습니다. 일곱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해 정치적으로도 무게가 컸습니다. 보헤미아에는 독특한 종교 전통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선 1415년, 프라하 대학의 학자 얀 후스가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다 화형당했고, 그를 따르는 후스파가 오랫동안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16세기에는 인구 대부분이 개신교였고, 왕은 신앙의 자유를 문서로 보장해 주어야 했습니다.
또한 왕위가 아들에게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고 귀족들의 회의에서 정해지는 전통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도 프라하에는 전설이 가득합니다.
나라를 세운 여왕 리부셰가 언덕에 서서 '내 눈에 위대함이 하늘에 닿는 도시가 보인다'고 예언해 프라하가 세워졌다는 이야기, 유대인 마을의 랍비가 진흙으로 빚어 만들어 낸 거인 골렘 이야기, 그리고 블라니크 산 속에서 성 바츨라프와 기사들이 잠들어 있다가 나라가 가장 위험할 때 깨어난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1618년 개신교 귀족들이 황제가 보낸 관리를 프라하 성 창문 밖으로 던진 사건을 시작으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패하면서 자치와 개신교 신앙을 모두 잃고 합스부르크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