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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신학자이자 대학 교수 (1483~1546)

생애

마르틴 루터는 1483년 지금의 독일 중부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한스는 구리 광산에서 일하다 작은 광산을 여럿 빌려 운영하게 된 사람으로,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며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1505년 스물한 살의 루터는 길에서 무서운 벼락을 만나 땅에 엎드린 채 '성 안나여, 살려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외쳤고, 살아남자 그 약속대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사가 된 뒤에도 그는 '내가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오래 시달렸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바울의 편지를 거듭 읽던 그는, 사람이 착한 일을 쌓아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생각이 그의 모든 주장의 뿌리가 됩니다.
그 무렵 교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려고 면벌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면벌부는 돈을 내면 죄에 따르는 벌을 덜어 준다는 증서인데, 판매를 맡은 설교자들은 '돈이 궤짝에 떨어져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오른다'고까지 말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것이 왜 잘못인지 따지는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대학과 교회에 알렸습니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못으로 붙였다는 유명한 장면은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이며 사실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마침 널리 퍼진 인쇄술 덕분에 이 글이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는 점입니다.
논쟁은 곧 교회 전체의 권위를 묻는 문제로 커졌습니다. 1520년 교황이 주장을 거두라는 경고 문서를 보내자 루터는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고, 이듬해 파문(교회에서 내쫓는 벌)을 당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황제 카를 5세와 제후들 앞에 선 그는 끝내 주장을 거두지 않으며 '내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황제는 그를 법의 보호 밖에 두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를 아끼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납치극을 꾸며 바르트부르크성에 숨겨 주었고, 루터는 수염을 기르고 '기사 외르크'로 행세하며 열 달을 지냈습니다. 이때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열한 주 만에 독일어로 옮겼는데, 누구나 알아듣는 말을 골라 쓴 이 번역은 오늘날 독일어 문장의 뼈대가 되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성에서 글을 쓰던 밤 악마가 나타나 방해하자 잉크병을 집어 던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관광객들은 지금도 벽에 남았다는 잉크 자국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가 연 문으로 그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도 쏟아져 나왔습니다. 1525년 독일 농민들이 무거운 부담을 줄여 달라며 들고일어났을 때, 루터는 농민들의 처지에는 공감했지만 폭력에는 반대하며 제후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으로 그는 농민들의 신뢰를 크게 잃었고, 오늘날에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대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수도원을 나온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해 여섯 아이를 두었고, 목사가 가정을 꾸리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루터는 노래도 만들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개신교 지역의 노래가 되어, 100년 뒤 30년 전쟁 때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병사들이 전투를 앞두고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말년에 그가 유대인을 겨냥해 쓴 거친 글들은 훗날 큰 해를 끼쳤고, 지금은 그의 어두운 유산으로 함께 기억됩니다.
1546년 루터는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영주들의 다툼을 중재하러 갔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9년 뒤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영주의 종교가 곧 그 땅의 종교'라는 원칙으로 루터파를 인정했지만, 뒤늦게 퍼진 칼뱅파는 여기에서 빠졌습니다. 이 빈틈과, 어느 편 신앙을 택하느냐로 갈린 제후들의 대립이 쌓이고 쌓여 1618년 30년 전쟁으로 터져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