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는 1372년무렵 보헤미아 왕국(지금의 체코)의 후시네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프라하로 가서 공부를 시작했고, 프라하 카를 대학교에 입학해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사제가 되어 1402년 프라하의 카를 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며, 성직자와 성도들이 설교를 듣는 베들레헴 예배당의 주임 사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 예배당은 라틴어가 아닌 보헤미아어(체코어)로 설교하는 곳이었습니다. 후스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설교하며 교회의 부패와 사치, 면벌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영국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아, 교회의 으뜸은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신앙의 가장 높은 기준은 성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후스는 예배를 드릴 때 신부뿐만 아니라 보통의 신도들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도들에게 빵만 나누어 주고 포도주는 신부만 마셨는데, 후스는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누구나 포도주를 마실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주장은 보헤미아 민중과 귀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교회 당국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교황은 후스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리고 프라하 도시 전체에 교회의 모든 의식을 멈추는 정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프라하 시민들이 피해를 볼 것을 걱정한 후스는 도시를 떠나 시골 마을들을 돌며 야외에서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1414년 독일 콘스탄츠에서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종교적 다툼을 정리하기 위한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시기스문트는 후스에게 신변을 안전하게 보장하겠다는 구류증(안전보장서)을 주며 공의회에 나와 자기 생각을 밝히라고 권했습니다. 후스는 자기 주장을 밝히고 교회를 설득하려는 마음으로 콘스탄츠로 갔습니다.
하지만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자 후스는 체포되어 어둡고 축축한 감옥에 갇혔습니다. 공의회는 후스의 신변 안전 보장을 무시한 채, 그에게 주장을 모두 취소하고 사과하라고 압박했습니다. 후스는 '성경에 비추어 내 오류가 증명되지 않는 한, 나는 어떠한 주장도 철회할 수 없다'며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1415년 7월 6일, 공의회는 후스에게 이단 선고를 내리고 사제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그날 후스는 콘스탄츠의 기둥에 묶여 화형당했습니다. 불길이 솟구칠 때 후스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고, 사람들은 그의 유골과 흙을 잘 모아서 강에 흘려보내 재조차 보헤미아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후스는 화형대에서 '지금 너희는 거위 한 마리를 구워 먹지만, 100년 뒤에는 구울 수도 튀길 수도 없는 백조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며, 훗날 사람들은 이 백조를 마르틴 루터로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를 뜻합니다.)
후스의 화형 소식이 전해지자 보헤미아 전체가 분노로 끓어올랐습니다. 보헤미아 사람들과 귀족들은 후스의 가르침을 따라 후스파를 만들었고, 황제와 가톨릭 십자군에 맞서 15년 넘게 후스 전쟁(1419~1434)을 벌였습니다. 후스의 종교개혁 정신과 보헤미아의 자치의식은 보헤미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훗날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루터 역시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후스파였다'라며 얀 후스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1618년 보헤미아 귀족들이 가톨릭을 강요하는 페르디난트 2세에 맞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을 일으키며 30년 전쟁의 막이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