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2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나 예수회가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 문제에서는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고, 스물한 살에 자기 영지인 슈타이어마르크를 다스리게 되자 그곳의 개신교 목사들을 모두 내쫓고 주민들에게 가톨릭으로 돌아오거나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방식이 성공하자 그는 같은 일을 제국 전체에서도 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1617년 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뽑히자 개신교가 다수였던 보헤미아 귀족들은 크게 불안해했습니다. 실제로 개신교 교회 두 곳이 헐리는 일이 벌어졌고, 1618년 귀족들은 프라하 성으로 몰려가 황제가 보낸 관리들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이듬해 황제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 2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친척과 바이에른의 가톨릭 동맹에 도움을 청했고,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승리해 보헤미아를 완전히 손에 넣었습니다.
1620년대 후반, 발렌슈타인이 모아 준 대군 덕분에 그의 힘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1629년 반환 칙령을 내려 개신교 제후들이 지난 77년 동안 차지한 교회 재산을 모두 돌려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개신교 제후들을 절박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황제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꺼린 가톨릭 제후들까지 등을 돌리게 했습니다. 제후들의 압박에 밀려 그는 1630년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스웨덴 군대가 독일에 상륙했습니다.
스웨덴에 밀리자 그는 다시 발렌슈타인을 불렀지만, 이 사령관이 자기 뜻대로 적과 협상을 벌인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1634년 그의 지휘권을 박탈했고 발렌슈타인은 곧 부하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듬해 페르디난트 2세는 반환 칙령을 사실상 거두는 프라하 화약을 맺어 제국 안의 전쟁을 끝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곧바로 참전하면서 전쟁은 종교 문제를 넘어선 강대국 다툼으로 바뀌었고, 그는 평화를 보지 못한 채 1637년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