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 서북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산악 지역입니다. 웅장한 디나르알프스산맥이 국토를 가로지르며, 북쪽의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보스니아'와 남쪽의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카르스트 암벽 지대인 '헤르체고비나' 두 지방으로 나뉩니다. 사바강과 네레트바강, 드리나강이 협곡을 따라 굽이쳐 흐르는 천혜의 요새 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는 길목으로, 보스니아인(보스냐크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남슬라브 계통의 여러 민족이 터전을 이루었습니다. 중세 보스니아 왕국을 거쳐 수백 년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이슬람교, 동방 정교회, 가톨릭교가 한 도시에 어우러졌으며, 수도 사라예보는 교회와 모스크, 유대교 회당이 공존하여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1878년 베를린 회의를 거쳐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 지역을 일방적으로 강제 병합하면서, 남슬라브인의 통일을 염원하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1914년 6월 수도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 근처에서 울린 총성(사라예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인류사적 비극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오늘날에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간직한 아름다운 독립 국가로 발칸반도의 중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라예보 - 발칸 반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중심 도시로, 밀랴츠카강 유역의 산악 분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거치며 이슬람교, 가톨릭, 동방정교회 문화가 어우러져 '유럽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이곳 라틴 다리 인근에서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저격당했습니다. 이 '사라예보 사건'은 열강들의 동맹 체제를 자극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을 촉발한 역사적 도화선이 되었습니다.의 아침 공기를 가른 두 발의 총성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재앙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타협으로 탄생하여 중동부 유럽을 다스린 다민족 이중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로,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촉발한 인물입니다. 부부가 세르비아 - 중세 발칸반도를 주름잡았던 강력한 기독교 국가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 -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청년으로,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저격해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을 당긴 인물입니다.의 총탄에 쓰러지자, 빈 -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도나우강 중류 분지에 자리 잡은 중부 유럽의 핵심 도시입니다. 알프스산맥 동쪽 끝자락과 카르파티아산맥이 만나는 교통의 십자로에 위치해, 고대 로마 시대 국경 군사 기지였던 '빈도보나(Vindobona)'에서 출발하여 동서 유럽을 잇는 교역과 외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13세기 후반부터 약 640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로서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유럽으로 진격하던 오스만 제국군의 두 차례 대포위를 막아내며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최전선 방벽으로 불렸고, 1814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새로운 국제 질서를 설계한 '빈 회의'가 열린 외교의 무대였습니다. 웅장한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른 궁전을 중심으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활약하며 '음악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고, 19세기 말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예술과 학문이 꽃피는 찬란한 세기말 문화를 이룩했습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직후 이곳의 제국 수뇌부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결정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패전과 함께 제국이 해체된 뒤 오늘날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의 지도부는 이를 눈엣가시 같던 세르비아를 완전히 굴복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동맹국 독일로부터 무조건적인 군사 지원을 약속하는 '백지위임장'을 받아 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가혹한 최후통첩 - 최후통첩이란 국가 간 외교 협상에서 '특정 시한 내에 우리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협상을 끝내고 전쟁(무력 행사)을 시작하겠다'고 알리는 마지막 공식 경고문입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1914년 7월 23일의 문서를 역사적으로 '7월 최후통첩(오스트리아의 대세르비아 최후통첩)'이라 부릅니다. 사라예보에서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세르비아를 무력으로 굴복시킬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도록 48시간의 시한과 함께 10가지 가혹한 요구 조건을 보냈는데, 반오스트리아 언론과 단체를 모두 해산하라는 요구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관리와 경찰이 직접 세르비아 영토 안에 들어와 암살 배후를 수사하고 재판에 개입하겠다'는 조항(제6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독립 국가의 땅에서 외국 관리가 수사권을 행사하라는 요구는 한 나라의 주권과 사법권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전쟁을 피하고자 이 조항 하나만 빼고 나머지 9개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답했으나, 이미 개전을 결심했던 오스트리아는 즉각 외교 관계를 끊고 7월 28일 선전포고를 감행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을 보냈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하자 7월 28일 마침내 선전포고를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슬라브 민족의 맹주를 자처하던 러시아 제국 - 표트르 대제 이후 발트해부터 태평양까지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확장했던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의 니콜라이 2세 황제 -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차르)로, 1914년 세르비아를 구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려 제1차 세계 대전 확전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거듭된 패전과 기근 끝에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퇴위당해 300년 로마노프 왕조의 막을 내린 인물입니다.가 즉각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독일은 큰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프랑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수립되어 벨 에포크와 제1차 세계 대전 승리를 이끈 공화국는 러시아와 함께 '삼국 협상' 및 '러불 동맹'으로 굳게 묶인 동맹국이었기에, 러시아와 전쟁이 나면 서쪽의 프랑스 역시 자동으로 독일을 협공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동쪽의 러시아와 서쪽의 프랑스 사이에 끼어 치명적인 양면전쟁을 치를 공포에 사로잡힌 독일은, 거대한 러시아군이 완전히 집결하기 전에 서쪽의 프랑스를 먼저 단숨에 쓰러뜨린다는 작전 계획에 따라 러시아(8월 1일)에 이어 프랑스(8월 3일)에도 잇달아 선전포고를 퍼부었습니다. 이어 독일군은 프랑스 국경의 강력한 요새망을 우회하기 위해 중립국 벨기에의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독일 지도부는 영국 - 압도적인 해군력과 산업력을 바탕으로 지구 표면의 4분의 1을 지배했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참전 위험성을 알면서도, 섬나라인 영국이 '단지 종이쪽지 같은 옛 조약 때문에 대륙의 거대한 피바람에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라 희망 섞인 낙관을 품었습니다. 설령 영국이 참전하더라도 당시 영국의 육군 규모는 대륙 열강에 비해 매우 작았기에, 영국의 원정군이 본격적으로 파견되기 전 6주 만에 프랑스를 단기 결전으로 굴복시키면 그만이라는 치명적인 도박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벨기에의 항구가 독일 손에 들어가면 본토 안보에 비수가 꽂힌다고 판단한 영국은 1839년 런던 조약 - 1839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유럽 5대 강대국이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세 중립을 공식 보장하기 위해 체결한 국제 조약입니다. 벨기에는 도버 해협 바로 건너편에 위치하여, 프랑스나 독일 같은 대륙의 패권국이 벨기에의 항구(안트베르펜 등)를 장악할 경우 영국의 안보에 치명적인 비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어떤 강대국도 벨기에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중립을 보장하는 이 조약을 주도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독일 제국이 프랑스를 기습하기 위해 벨기에를 침범하자, 영국은 조약에 따라 벨기에를 방위하고 자국 안보를 지키고자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독일 총리가 이 조약을 가리켜 '단지 종이쪽지(a scrap of paper)에 불과하다'고 폄하한 일화로도 유명합니다.의 벨기에 영세 중립 보장 의무를 내세워 즉각 독일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로써 불과 한 달 만에 전 유럽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유럽의 젊은이들은 '낙엽이 지기 전,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올 것'이라는 순진한 낙관론에 취해 환호하며 기차에 올랐습니다. 독일 참모본부는 거대한 러시아군이 결집하는 데 적어도 6주가 걸릴 것이라 장담하며, 벨기에를 관통해 프랑스군 배후를 낚아채는 '슐리펜 계획 - 독일 제국 육군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수립한 단기 결전 군사 작전입니다. 동쪽의 거대한 러시아 제국이 군대를 동원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서쪽의 프랑스를 6주 만에 신속하게 격파한 뒤 전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돌려 러시아를 상대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강력한 국경 요새를 피하기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여 우회 진격하려 했으나, 벨기에의 완강한 저항과 영국의 참전을 불렀습니다. 결국 1914년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저지당하면서 슐리펜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전쟁은 장기 참호전으로 빠져들었습니다.'을 가동했습니다. 그러나 벨기에 군대는 리에주 요새 등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하며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고, 그 틈에 영국 원정군이 해협을 건너와 전선에 합류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군이 예상보다 훨씬 빠른 2주 만에 동프로이센으로 들이닥치자, 독일군은 서부 전선의 핵심 병력을 동부로 떼어내는 치명적인 오판을 범했습니다. 파리 턱밑 마른강 -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 고원에서 발원하여 샹파뉴 지방을 거쳐 파리 동남쪽에서 센강으로 합류하는 약 514km 길이의 중요한 강입니다. 유역에는 울창한 포도밭과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역사적으로 파리를 동쪽으로부터 방어하는 핵심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1914년 9월, 슐리펜 계획에 따라 파리 턱밑까지 거침없이 진격하던 독일군을 프랑스군과 영국 원정군이 마른강 일대에서 필사적인 반격으로 가로막았습니다(제1차 마른 전투). 파리의 택시들까지 징발해 병력을 수송했던 이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며 독일의 단기 결전 구상이 산산조각 났고, 서부 전선은 4년간의 참호전으로 굳어졌습니다. 1918년 7월에는 서부 전선에서 승패를 걸고 감행한 독일군의 마지막 대공세를 연합군이 다시 한번 마른강에서 분쇄하고(제2차 마른 전투) 대대적인 반격으로 전환하면서 종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까지 도달했던 독일군은 파리 시내 택시 수백 대까지 징발해 병력을 수송한 프랑스군의 필사적인 반격(제1차 마른 전투)에 가로막혀 후퇴했습니다. 양측 군대는 상대의 옆구리를 찌르고자 북해 - 그레이트브리튼섬(영국)과 유럽 대륙(스칸디나비아반도,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사이에 자리 잡은 대서양의 중요한 연해입니다.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크며 거친 풍랑과 짙은 안개로 악명이 높지만, 청어와 대구 등 풍부한 어장과 활발한 해상 교역로를 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이킹의 항해 통로였으며, 중세에는 한자 동맹 상인들의 주요 무역 무대였습니다. 근대 이후에는 세계 해상 패권을 쥔 영국 해군과 대륙 세력 간의 치열한 해양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마른 전투 이후 양측 군대는 상대의 서쪽 옆구리를 돌아 나가기 위해 북쪽 바다를 향해 참호를 파며 치달렸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바다로의 질주'라 부릅니다. 또한 영국 해군은 북해를 철통같이 봉쇄하여 독일로 들어가는 물자를 완벽히 차단했고, 1916년에는 양국 해군이 북해 유틀란트반도 앞바다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거대 함대 결전인 '유틀란트 해전'을 벌였습니다.를 향해 치달렸으나(바다로의 질주), 결국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7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참호선을 파고 대치하면서 단기전의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스위스 국경부터 북해까지 이어진 전선은 분당 수백 발의 탄환을 뿜어내는 수랭식 기관총 - 방아쇠를 당기면 탄약이 자동으로 연속 발사되는 자동 화기입니다. 19세기 말 하이럼 맥심이 발명한 맥심 기관총을 시초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보병 수백 명의 화력을 단 한 대의 화기로 뿜어내며 방어전의 절대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분당 400~600발에 달하는 막강한 연사 속도는 평원을 가로질러 돌격하던 기병과 보병 대열을 단숨에 쓸어버렸습니다. 기관총의 위력 앞에 기존의 정면 돌격 전술은 무력화되었고, 군인들이 땅을 파고 숨어들면서 기나긴 참호전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과 대구경 중포의 화망에 가로막혀 완벽한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중세적 기사도와 화려한 제복의 시대는 끝났고, 장교의 호각 소리에 맞춰 참호 밖으로 뛰어든 병사들은 철조망에 얽힌 채 기관총 탄막에 쓰러져 갔습니다. 1916년, 독일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 제1차 세계 대전 중기(1914~1916) 독일 제국군을 이끈 참모총장으로, 프랑스군의 전력을 완전히 고갈시키겠다며 사상 최악의 소모전인 베르됭 전투를 기획한 인물입니다.은 '프랑스 육군의 피를 남김없이 말리겠다'며 요새 도시 베르됭 -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 뫼즈강 변에 자리한 유서 깊은 요새 도시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파리로 향하는 동쪽 길목을 지키는 관문 역할을 했으며, 19세기 말 프랑스는 이곳에 두오몽 요새를 비롯한 강력한 지하 요새망을 구축했습니다. 1916년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피를 말려 항복시키겠다'는 목표로 베르됭을 맹공격하며 역사상 가장 잔혹한 소모전인 '베르됭 전투'를 일으켰습니다. 10개월 동안 7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프랑스군은 끝내 요새를 지켜내며 불굴의 저항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에 2백만 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었고, 필리프 페탱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보급로 확보와 병력 순환 배치로 베르됭 요새를 지켜내고 병사들의 생명을 아껴 '베르됭의 사자'로 추앙받았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과 협력한 비시 프랑스 수반이 되어 몰락한 프랑스 원수입니다.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그들은 지나가지 못한다(Ils ne passeront pas)'는 결사항전으로 맞섰습니다. 베르됭의 압박을 분산하고자 더글러스 헤이그 - 1915년부터 1918년 종전까지 서부 전선의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을 지낸 육군 원수로, 솜 전투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비판을 받았으나 세계 최초로 전차(탱크)를 실전에 투입하고 1918년 백일 공세의 선봉에서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돌파한 인물입니다. 장군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솜강 -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 흘러드는 완만하고 아름다운 강입니다. 완만한 구릉지와 울창한 숲,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진 목가적인 강 유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1916년 7월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베르됭 요새의 부담을 덜고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솜강 일대에서 대대적인 연합 공세를 펼쳤습니다. 첫날에만 영국군 2만 명이 전사하는 참극을 겪었고, 세계 최초로 전차가 실전에 투입되는 등 참호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전장이 되었습니다.에서 대공세를 감행했으나, 첫날에만 6만 명에 가까운 영국군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을 겪었습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참호의 지옥을 돌파하기 위해 인류는 가장 끔찍한 과학 기술을 동원했습니다. 폐를 녹이고 질식시키는 황록색 독가스 - 인체에 치명적인 유독 화학 물질을 공기 중에 살포하여 호흡기나 피부를 마비시키고 살상하는 화학 무기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 속에 숨은 적군을 몰살하고 방어선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규모로 사용되었습니다. 1915년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군이 염소 가스를 살포한 것을 시작으로 양측 모두 포스겐, 겨자 가스 등을 살포하며 전장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독가스는 수많은 군인에게 실명과 폐 질환 등 평생의 고통을 안겼으며, 전후 1925년 제네바 의정서를 통해 전장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가 참호 속을 기어 다녔고, 영국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장관으로서 대함대 동원과 최초의 전차(탱크) 개발을 주도했으며, 야심 차게 기획한 갈리폴리 상륙 작전이 참패하자 장관직에서 물러나 서부 전선 참호의 대대장으로 직접 참전한 뒤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정치가입니다.의 주도로 철조망을 짓밟고 기관총 진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극비리에 제작된 강철 궤도 괴물 '전차 - 두꺼운 장갑과 무한궤도를 장착하여 적의 총탄과 험난한 지형을 뚫고 대포나 기관총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중무장 전투 차량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 진지로 막힌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영국에서 극비리에 개발되었습니다. 개발 당시 기밀 유지를 위해 전선에 보내는 급수용 물탱크(Tank)로 위장했던 것에서 '탱크'라는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마크 I' 전차가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초기 잦은 고장에도 불구하고 보병 돌격을 이끄는 지상전의 핵심 주역으로 발전했습니다.(탱크)'가 솜 전선에 최초로 등장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기관총을 장착한 전투기로 진화하며 지상과 공중, 해저를 아우르는 3차원 산업 총력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수년간 이어진 참호의 도살장은 군인뿐 아니라 국가 전체의 자원과 인내를 남김없이 갉아먹는 총력전이었습니다. 영국의 철통같은 해상 봉쇄로 굶주림과 보급난에 허덕이던 독일은 최후의 도박으로 중립국 상선까지 무차별 침몰시키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독일의 패착이 되었습니다. 독일 잠수함의 미국 상선 격침과 멕시코를 부추겨 미국을 공격하려던 '치머만 전보 - 1917년 1월,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이 주멕시코 독일 대사에게 보낸 극비 외교 암호 전보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판도를 바꾼 가장 결정적인 외교 첩보 사건 중 하나로 꼽힙니다. 독일이 중립국 상선까지 무차별 침몰시키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하면 미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치머만은, 미국의 참전을 방해하기 위해 멕시코에 군사 동맹을 제안했습니다. 독일이 군자금을 지원할 테니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해 준다면, 과거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파격적인 비밀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극비 전보는 영국 해군 정보국 '룸 40'에 의해 감청 및 해독되었고, 영국은 이를 1917년 2월 미국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전보 내용이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폭로되자 미국 여론은 격렬하게 분노했으며, 고립주의를 유지하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미 의회가 1917년 4월 전격적으로 참전을 결정하는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사건이 폭로되자, 우드로 윌슨 - 제28대 미국 대통령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고 '14개조 평화 원칙'과 국제연맹 창설을 주도한 정치가입니다. 대통령이 이끄는 거대한 산업 국가 미국이 1917년 4월 연합국 측에 전격 참전했습니다. 반면 동부 전선에서는 극심한 전사자 수와 굶주림에 지친 러시아 민중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퇴위하며 300년 역사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고, 이어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레닌 -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지도자로, 1917년 독일이 제공한 '봉인 열차'를 타고 귀국해 '평화, 토지, 빵'을 외치며 10월 혁명을 일으켰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퇴시킨 뒤 소련을 건국한 인물입니다.의 볼셰비키 정권은 1918년 초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1918년 3월 3일, 소비에트 러시아(볼셰비키 정권)와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불가리아) 사이에 체결된 단독 강화 조약입니다. 오늘날 벨라루스 국경 도시인 브레스트(당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서명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고 권력을 장악한 레닌과 볼셰비키 정권은 '빵과 평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염원에 따라 참혹한 전쟁에서 빠져나오고자 했습니다. 불리한 전황 속에서 체결된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핀란드 등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는 제정 러시아 영토의 약 4분의 1과 인구의 3분의 1, 철강 생산량의 대부분을 잃는 가혹한 대가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동부 전선이 완전히 종결되면서 독일군은 동부의 수십 개 사단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1918년 최후의 '춘계 대공세'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독일이 패망하고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이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동유럽에는 수많은 신생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을 체결하며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동부 전선이 사라지자 파울 폰 힌덴부르크 - 타넨베르크 전투의 대승으로 독일의 구국 영웅이 되었으며, 1차 대전기 독일군 최고사령부와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을 이끈 군인이자 정치인입니다. 원수와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독일 최고사령부는 서부 전선에 병력을 쏟아부어 미군이 본격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는 1918년 '춘계 대공세'에 모든 운명을 걸었습니다.
독일군의 마지막 공세는 파리 인근까지 전선을 밀어붙였으나, 심각한 보급 부족과 병력 소모로 인해 결국 기세가 꺾였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은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백일 공세를 지휘하여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프랑스의 명장입니다. 원수를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돌입했습니다. 매달 수십만 명씩 쏟아져 들어오는 새롭게 투입된 미군 지원병과 수천 대의 전차, 압도적인 항공 화력을 결합한 '백일 공세'가 시작되자, 독일군이 난공불락이라 자랑하던 힌덴부르크 방어선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1916년 겨울부터 1917년 초에 걸쳐 프랑스 북동부 전선 후방에 구축한 거대한 콘크리트 지하 요새 방어선입니다. 독일 최고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지휘 아래 건설되었으며, 독일군 내부에서는 '지크프리트 위치(Siegfriedstellung)'라 불렸습니다. 1916년 솜 전투와 베르됭 전투로 극심한 병력 소모를 겪은 독일군은 돌출된 전선을 뒤로 물려 방어선을 단축하고 병력을 절약하기 위해 이 방어선을 세웠습니다. 수 킬로미터 깊이로 촘촘히 얽힌 철조망, 콘크리트 기관총 벙커, 지하 막사, 대구경 포병 진지 및 터널망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20세기 최초의 종심 방어 진지로, 당대 군사 공학상 난공불락의 요새로 꼽혔습니다. 1918년 연합군이 수천 대의 전차와 압도적인 항공 화력을 집중한 '백일 공세'를 감행하면서, 난공불락이라 여겨졌던 생캉탱 운하 일대의 힌덴부르크 방어선이 마침내 돌파당했습니다. 이 방어선이 무너지자 독일 군부는 군사적 패배가 돌이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휴전 협상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은 곳곳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군사적 패배에 절망한 킬 군항 -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주도이자 발트해와 북해를 잇는 킬 운하의 동쪽 입구에 자리 잡은 독일 제국 해군의 최대 핵심 군항입니다. 깊은 수심과 천혜의 만(Firth) 지형 덕분에 제국 건국 이후 빌헬름 2세 황제의 대양함대 건설 정책을 떠받치는 심장부로 발전했습니다. 1918년 10월 말, 이미 육상 전선에서 패배가 굳어진 상황에서 독일 해군 사령부는 해군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영국 해군을 상대로 승산 없는 자살적 총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킬 군항의 수병들과 노동자들은 무의미한 희생을 거부하며 11월 3일 전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킬 군항의 반란'은 순식간에 함부르크, 뮌헨, 베를린 등 독일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 '11월 혁명'으로 폭발했습니다.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결성되어 도시를 장악했고, 결국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유구한 호엔촐레른 왕조와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의 독일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혁명의 불길이 번졌고, 빌헬름 2세 황제 -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팽창주의적 세계 정책과 거대 해군 증강을 추진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과 함께 제국을 붕괴로 이끌었습니다.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프랑스 콩피에뉴 숲의 기차 객차에서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4년 3개월에 걸친 대살육의 총성이 멎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유럽과 서아시아를 지배했던 독일 제국 - 1871년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통일을 이룩하며 유럽 최강의 군사·산업 대국으로 군림했던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현재의 튀르키예)의 작은 튀르크 부족에서 시작해, 동남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세 대륙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지배한 강력한 이슬람 제국입니다.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양과 서양의 교차점을 장악하고 중요한 무역로를 통제하며 번영을 누렸습니다.오스만의 위대한 꿈과 건국전설에 따르면, 13세기 후반 제국을 세운 오스만 1세는 어느 날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존경하는 이슬람 학자의 가슴에서 달이 떠올라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오더니, 배꼽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그 가지가 온 세상을 덮는 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꿈을 오스만과 그의 후손들이 세상을 다스릴 거대한 제국을 세울 것이라는 하늘의 계시로 믿었습니다.콘스탄티노플 함락오스만 군대의 핵심은 엄격한 훈련을 받은 최정예 보병대 예니체리였습니다. 이들과 거대한 화약 대포를 앞세워, 1453년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천 년을 버텨온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역사적인 승리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고, 도시는 오스만의 새롭고 화려한 수도가 되었습니다.황금기를 이끈 쉴레이만 대제제국은 16세기 쉴레이만 1세(대제)의 통치 아래 가장 눈부신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할 정도로 유럽 깊숙이 영토를 넓힌 뛰어난 정복자였을 뿐만 아니라, 법을 훌륭하게 정비하고 예술을 사랑한 성군이었습니다. 그의 시대에 오스만 제국은 엄청난 부를 누렸으며, 문화와 건축, 과학이 크게 발달했습니다.쇠퇴와 제국의 멸망하지만 영원한 제국은 없었습니다.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은 내부의 부패와 기술 발전의 정체로 서서히 힘을 잃어갔습니다.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등 강해지는 유럽 국가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세기에는 '유럽의 병자'라는 슬픈 별명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년)에서 패배한 제국은 영토가 갈기갈기 찢기며 1922년에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영도 아래 오늘날의 튀르키예 공화국이 새롭게 탄생하게 됩니다. 등 4대 거대 제국이 산산조각 나며 몰락했고, 그 폐허 위에서 현대 세계의 새로운 국경과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