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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릴로 프린치프

청년 보스니아 결사대원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보스니아) 1894년 ~ 1918년 (나이: 24세)
"나는 유고슬라브 민족주의자이며, 모든 남슬라브인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어떤 형태의 국가가 되든 상관없으나 반드시 오스트리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 1914년 10월 사라예보 법정에서 범행 동기를 묻는 판사에게 남긴 진술.

생애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1918)는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학생이자 민족주의 운동가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저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촉발한 인물입니다.

가난한 유년기와 남슬라브 민족주의

프린치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서부의 산골 마을 오블랴이에서 가난한 세르비아계 소작농의 아홉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습니다. 형제 중 여섯 명이 유아기에 사망할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체구가 작고 병약했지만 독서와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라예보의 상업학교로 진학한 그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정식으로 강제 병합하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남슬라브 민족 전체가 하나의 독립 국가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은 그는 학생 비밀 결사 '청년 보스니아'에 합류했습니다. 1912년 반오스트리아 시위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한 뒤에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까지 280킬로미터를 걸어가 발칸 전쟁 의용군에 지원했으나, 왜소한 체격과 약한 폐 건강 때문에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라예보의 우연과 두 발의 총성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군사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필 이날은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 숨진 조상들을 기리는 세르비아 민족의 신성한 기념일인 '비도브단'이었습니다. 이를 민족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 프린치프와 동료 청년들은 세르비아 군부 내 비밀 조직 '검은 손'으로부터 브라우닝 반자동 권총과 수류탄, 청산가리를 건네받아 암살 길목에 매복했습니다.

오전 10시경, 동료 차브리노비치가 대공의 차량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튕겨 나가 뒤따르던 수행원 차량만 파손되었습니다. 첫 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린치프는 모리츠 실러 샌드위치 가게 앞 거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시청 행사를 마친 대공이 부상당한 장교들을 문병하려고 일정을 급히 바꾼 사실을 전달받지 못한 운전사가 바로 프린치프가 서 있던 골목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고, 차를 되돌리려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 섰습니다. 눈앞 1.5미터 거리에 대공 부부가 탄 오픈카가 멈추는 기막힌 우연 속에서, 프린치프는 권총을 뽑아 두 발을 쏘았고 대공과 부인 조피는 곧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성년자 판결과 테레지엔슈타트 옥중의 최후

거사 직후 프린치프는 준비해 둔 청산가리를 삼켰으나 약효가 변질되어 구토만 했고, 권총으로 자결하기 전 군중에게 제압당했습니다. 1914년 10월 열린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목표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남슬라브인을 해방하고 통합하는 것이었음을 당당히 밝혔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법은 범행 시점에 만 20세 미만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프린치프는 스무 살 생일을 불과 27일 앞두고 저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교수형을 면하고 최고형인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보헤미아의 테레지엔슈타트 요새 감옥 독방에 쇠사슬로 묶인 채 수감된 그는 극심한 영양실조와 뼈가 썩어 들어가는 골결핵에 시달렸고, 결국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습니다. 몸무게가 40킬로그램 남짓까지 줄어든 그는 전쟁이 끝나기 7개월 전인 1918년 4월 28일, 자신이 쏜 두 발의 총성이 네 개의 거대 제국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보지 못한 채 23세의 나이로 숨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