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군장관 / 군수장관 / 총리
"우리 군대를 보내 플랑드르의 철조망이나 씹게 만드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단 말입니까?"— 1914년 12월 29일 서부 전선의 참호전 교착을 우회하기 위해 다르다넬스·갈리폴리 작전을 제안하며 애스퀴스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맞서 영국을 구한 총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앞선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해군장관, 최전선 참호의 대대장, 군수장관을 두루 거치며 가장 극적인 부침을 겪은 주역이었습니다.
영국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말버러 공작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인도와 수단 전선에서 기병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1899년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에 종군 기자로 참가했다가 포로로 붙잡혔으나, 수용소 담장을 넘어 수백 킬로미터를 탈출하는 무용담으로 25세에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되어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911년 독일 제국의 해군 확장에 맞서기 위해 36세의 젊은 나이에 해군장관에 임명된 처칠은, 군함의 동력을 석탄에서 속도가 빠른 석유로 전면 교체하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914년 7월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내각의 공식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영국 해군 대함대를 전략 기지로 이동시켜, 개전과 동시에 독일 해군을 북해 안에 봉쇄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서부 전선이 철조망과 기관총에 막혀 끔찍한 참호전의 수렁에 빠지자, 처칠은 '우리 병사들을 플랑드르의 철조망이나 씹게 만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가?'라며 두 가지 돌파구를 추진했습니다. 첫째는 신무기였습니다. 육군부가 고리타분하게 망설이자,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1915년 초 해군 예산을 끌어와 '육상 군함 위원회'를 비밀리에 세우고 무한궤도를 장착한 장갑차량 개발을 지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전차(탱크)였습니다.
둘째는 우회 상륙 작전이었습니다. 처칠은 서부 전선에서 무의미한 소모전을 벌이는 대신,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으로 오스만 제국의 다르다넬스 해협과 갈리폴리 반도를 타격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러시아로 가는 보급로를 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15년 감행된 갈리폴리 전역은 기뢰망과 무스타파 케말 등이 이끈 오스만군의 완강한 해안 절벽 방어에 막혀 25만 명이 넘는 연합군 사상자를 내는 대참사로 끝났습니다.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처칠은 해군장관직에서 쫓겨났고, 정치 생명이 끝났다는 조롱 속에 내각에서 사임했습니다.
불명예를 씻기 위해 41세의 전직 장관 처칠은 곧장 군복을 입고 프랑스로 건너가 제6왕립스코틀랜드소총대대 대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벨기에 플뢰그스테르트의 진흙탕 참호 최전선에서 포탄을 무릅쓰고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이후 1917년 로이드 조지 총리의 부름을 받아 군수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한 그는 수많은 포탄과 항공기, 그리고 자신이 씨앗을 뿌렸던 전차를 대량 생산하여 1918년 연합군의 최종 승리를 뒷받침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과 총력전 지휘 경험은 20여 년 뒤 빛을 발했습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대륙이 나치 독일에 함락되어 영국이 홀로 남았을 때, 65세의 처칠은 총리에 취임해 '피와 노고와 눈물과 땀'이라는 불굴의 연설로 국민을 단결시켜 끝내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뒤 1965년 90세로 영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