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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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제국 참모총장 / 프로이센 전쟁장관

독일 제국 (프로이센) 1861년 ~ 1922년 (나이: 61세)
"프랑스 국민들에게 군사적으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수만 있다면, 프랑스는 한계점에 도달할 것이며 영국의 가장 날카로운 칼은 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 1915년 겨울 황제에게 베르됭 소모전 계획을 건의하며 작성한 비망록에서.

생애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1861~1922)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로이센 전쟁장관이자 1914년부터 1916년까지 독일 제국 참모총장을 지내며 서부 전선의 참호전과 베르됭 전투를 지휘한 인물입니다.

초기 군 경력과 프로이센 전쟁장관 취임

서프로이센의 몰락한 융커(지주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팔켄하인은 열 살에 유년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베를린 육군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896년 청나라로 건너가 신식 군대 교관으로 활동했고,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에는 8개국 연합군 참모로 복무하며 국제적인 실전 감각을 익혔습니다. 귀국 후 뛰어난 행정 능력과 언변으로 빌헬름 2세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그는 1913년 5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프로이센 전쟁장관으로 발탁되어 독일 육군의 군비 확장을 주도했습니다.

참모총장 취임과 동·서부 전선의 전략 갈등

1914년 9월, 독일의 단기 결전 구상이었던 슐리펜 계획이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좌절되자 소(小)몰트케 참모총장이 신경쇠약으로 쓰러졌고, 팔켄하인이 비밀리에 후임 참모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측면을 포위하려던 '바다로의 질주'가 참호전으로 막히자, 독일이 양면전쟁에서 단번에 압도적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다는 냉정한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1915년 내내 그는 동부 전선의 영웅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및 루덴도르프와 치열한 전략 논쟁을 벌였습니다. 힌덴부르크는 동부 전선에 병력을 몰아주어 러시아를 먼저 완전히 굴복시키자고 주장했지만, 팔켄하인은 끝없이 넓은 러시아 영토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대신 제한적인 공세로 러시아군을 폴란드에서 몰아낸 뒤, 전쟁의 승패를 가를 주 전장은 결국 서부 전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베르됭의 '피의 펌프'와 해임

1915년 말, 팔켄하인은 가장 끈질긴 적수인 영국의 전쟁 의지를 꺾으려면 먼저 대륙에서 '영국의 가장 훌륭한 칼' 역할을 하는 프랑스 육군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는 전선을 돌파하는 대신, 프랑스가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새 도시 베르됭을 공격 목표로 삼았습니다. 프랑스군이 베르됭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쏟아부으면 독일군의 우세한 중포 화력으로 '프랑스군의 피를 한 방울까지 말려버리겠다'는 냉혹한 소모전 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916년 2월 시작된 베르됭 전투는 필리프 페탱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프랑스군 못지않게 독일군도 3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쌍방의 도살장으로 변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7월에 영·프 연합군의 솜강 대공세가 터지고 8월에 루마니아까지 연합국 측에 참전하자, 빌헬름 2세는 팔켄하인을 해임하고 힌덴부르크를 신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후 야전군 사령관으로 물러난 팔켄하인은 제9군을 이끌고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단숨에 점령하며 전술적 능력을 입증했고, 종전 후 포츠담 인근 영지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다 192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