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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헤이그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 육군 원수

대영제국 (스코틀랜드) 1861년 ~ 1928년 (나이: 67세)
"우리에게 남은 길은 끝까지 싸우는 것뿐이다. 모든 진지를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수해야 하며 후퇴는 없다. 벽에 등을 맞대고 우리 대의의 정당함을 믿으며, 우리 모두 끝까지 싸워 나가자."
— 1918년 4월 11일 독일군의 춘계 대공세로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전 영국군에 내린 특별 명령문.

생애

더글러스 헤이그(Douglas Haig, 1861~1928)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915년 12월부터 종전까지 서부 전선의 영국 원정군(BEF) 총사령관을 지낸 육군 원수입니다. 솜 전투와 파스헨달 전투의 엄청난 인명 피해로 가혹한 비판을 받는 동시에, 신무기인 전차(탱크)를 적극 도입해 1918년 마침내 독일군 주력을 격파한 사령관이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위스키 가문의 도련님에서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유명한 위스키 양조 가문에서 태어난 헤이그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거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기병 장교로 임관한 그는 수단 원정(1898)과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1899~1902)에 참전해 실전 경험을 쌓았고, 이후 전쟁성에서 유럽 대륙에 즉각 파견할 수 있는 '영국 원정군'의 조직 체계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1군단장으로 참전해 제1차 마른강 전투와 이프르 방어전을 치렀고, 1915년 12월 존 프렌치 원수의 뒤를 이어 서부 전선 영국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에 올랐습니다.

솜 전투의 참극과 최초의 전차 실전 투입

1916년 여름, 헤이그는 베르됭에서 피를 흘리는 프랑스군을 돕고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 솜강 일대에서 대공세를 개시했습니다. 그는 1주일 동안 150만 발의 포탄을 퍼부으면 독일군의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가 모두 파괴될 것이라 믿고, 막 훈련을 마친 자원병 사단들에게 줄지어 걸어서 전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지하 벙커에 숨어 있던 독일군 기관총이 불을 뿜으면서, 공세 첫날인 1916년 7월 1일 단 하루 만에 영국군 사상자 약 5만 7천 명(전사자 1만 9천여 명)이 발생하는 영국 군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헤이그는 공세를 멈추지 않는 한편, 참호전을 뚫을 수 있는 과학 기술 도입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개발을 주도했던 비밀 무기인 전차(탱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1916년 9월 15일 솜 전선의 플레르-쿠르슬레트 전투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차를 실전에 투입했습니다.

'벽에 등을 대고'에서 1918년 백일 공세의 승리까지

1917년 가을 폭우 속에서 치러진 파스헨달 전투(제3차 이프르 전투)에서도 진흙탕 속에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비판에 직면했던 헤이그는, 1918년 봄 독일이 최후의 춘계 대공세를 퍼붓자 결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지휘부가 따로 놀면 패배한다고 판단한 그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장군을 연합군 통합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는 데 앞장섰고, 전선의 영국 장병들에게 '벽에 등을 맞대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리를 지키라'는 비장한 명령을 내려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냈습니다.

이어 1918년 8월 아미앵 전투를 시작으로 막을 올린 백일 공세에서 헤이그가 이끄는 영국군 60개 사단은 수백 대의 전차와 전투기, 정밀한 포병 탄막 사격을 하나로 묶은 현대적 제병협동 전술로 연합군의 선봉에 섰습니다. 영국군은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독일의 힌덴부르크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독일군 포로 약 20만 명과 야포 2,800여 문을 노획해 종전을 앞당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헤이그는 자신과 함께 싸우다 다치거나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병사들을 돕기 위해 영국 재향군인회와 양귀비 꽃 배지 모금 운동(포피 어필)을 창설해 헌신하다가 1928년 6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