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도
글꼴 크기
언어
테마

Loading Map...

Map height
Scroll Sensitivity1.0
서기 1301년경의 영토
1260년 – 1301년

몽골 제국의 분열 전쟁

1259년 대칸 몽케가 갑자기 죽은 뒤,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40년 동안 서로 싸운 전쟁입니다. 형제인 쿠빌라이 -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동생과의 계승 전쟁에서 이겨 대칸이 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다스린 군주입니다.아릭 부케 - 톨루이의 막내아들이자 쿠빌라이의 동생으로,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며 형과 대칸 자리를 다투었습니다. 초원의 옛 방식을 지키려는 세력을 대표했습니다.의 계승 다툼으로 시작해 캅카스 - 코카서스 산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들이 많고 매우 험난해서,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장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산맥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거인 프로메테우스가 그 벌로 이 산맥의 차가운 바위 절벽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았던 전설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또한 깊은 계곡과 험한 숲이 많아, 수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독특한 언어를 쓰며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의 산'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험난한 산맥은 어떤 대군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는 천연 방어 성벽이었습니다. 그러나 1222년,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혹독한 추위와 거친 바위 지형을 극복하고 이 코카서스 산맥을 횡단하는 기적적인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몽골군이 산맥을 넘어 갑자기 나타나자, 산맥 북쪽 초원에 살고 있던 알란족과 쿠만족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와 중앙아시아로 번졌고, 그 결과 하나였던 몽골 제국은 - 쿠빌라이 칸이 세운 몽골-중국 제국으로,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아 중국 전체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차가타이 칸국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 일 칸국 - 훌라구가 페르시아와 중동에 세운 몽골 칸국으로, 이름부터 대칸에게 복종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킵차크 칸국 - 바투가 볼가강 하류에 세운 유목 국가로, 약 250년 동안 루스 공국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군림했습니다.이라는 네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위치몽골 초원, 중앙아시아, 캅카스 - 코카서스 산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들이 많고 매우 험난해서,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장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산맥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거인 프로메테우스가 그 벌로 이 산맥의 차가운 바위 절벽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았던 전설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또한 깊은 계곡과 험한 숲이 많아, 수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독특한 언어를 쓰며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의 산'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험난한 산맥은 어떤 대군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는 천연 방어 성벽이었습니다. 그러나 1222년,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혹독한 추위와 거친 바위 지형을 극복하고 이 코카서스 산맥을 횡단하는 기적적인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몽골군이 산맥을 넘어 갑자기 나타나자, 산맥 북쪽 초원에 살고 있던 알란족과 쿠만족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지금의 몽골, 카자흐스탄, 러시아 남부, 이란, 아프가니스탄)
교전국쿠빌라이 -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동생과의 계승 전쟁에서 이겨 대칸이 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다스린 군주입니다. 세력 (뒷날의 - 쿠빌라이 칸이 세운 몽골-중국 제국으로, 대칸의 자리를 이어받아 중국 전체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아릭 부케 - 톨루이의 막내아들이자 쿠빌라이의 동생으로,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며 형과 대칸 자리를 다투었습니다. 초원의 옛 방식을 지키려는 세력을 대표했습니다. 세력 (몽골 초원의 전통파), 훌라구 - 서아시아 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복하고 페르시아 일대에 일한국을 건국한 몽골 제국의 황족이자 총사령관입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로서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고 아사신파의 본거지를 분쇄하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세력 (뒷날의 일 칸국 - 훌라구가 페르시아와 중동에 세운 몽골 칸국으로, 이름부터 대칸에게 복종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베르케 - 몽골 지배자 가운데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인물로, 바그다드를 무너뜨린 사촌 훌라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세력 (킵차크 칸국 - 바투가 볼가강 하류에 세운 유목 국가로, 약 250년 동안 루스 공국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군림했습니다., 금장 칸국이라고도 함), 카이두 - 대칸 자리를 빼앗긴 오고타이 가문의 손자로, 중앙아시아에서 30년 넘게 쿠빌라이와 그 후계자에게 맞섰습니다. 세력 (오고타이 가문과 차가타이 칸국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

배경 및 맥락

13세기 중반

너무 커져 버린 제국

제국은 태평양에서 흑해까지 뻗어 있었다. 얌이라 부르는 역참(파발마를 갈아타는 중계소)이 촘촘히 놓였어도 카라코룸 - 카라코룸은 1235년 오고타이 칸이 오르혼강 가에 세운 몽골 제국의 수도입니다. 지금의 몽골 하르호린 부근에 있었습니다.초원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먹여 살릴 곡식을 남쪽 농경지에서 실어 와야 했습니다. 이 약점 때문에 1261년 쿠빌라이가 보급로를 막자 성을 지키던 아릭 부케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습니다.세계 곳곳에서 사람이 모여든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잡혀 온 금세공사 기욤 부셰가 은으로 만든 커다란 나무를 궁궐에 세웠는데, 나무의 관에서 포도주와 마유주가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지금은 폐허만 남았고 그 돌로 지은 에르덴 조 사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에서 페르시아까지 소식이 오가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대칸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몇 달 뒤에야 닿는 크기의 나라에서, 한 사람이 전체를 다스리는 방식은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13세기

초원에서 살까, 도시에서 다스릴까

몽골 지배층은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초원의 옛 생활과 관습을 지키자는 쪽과, 정복한 농경 지역의 도시와 세금 제도를 받아들여 다스리자는 쪽이었다. 아릭 부케 - 톨루이의 막내아들이자 쿠빌라이의 동생으로,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며 형과 대칸 자리를 다투었습니다. 초원의 옛 방식을 지키려는 세력을 대표했습니다.는 전자를, 쿠빌라이 -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동생과의 계승 전쟁에서 이겨 대칸이 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다스린 군주입니다.는 후자를 대표했다. 계승 다툼은 곧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다툼이기도 했다.

13세기 후반

종교가 편을 가르다

킵차크 칸국 - 바투가 볼가강 하류에 세운 유목 국가로, 약 250년 동안 루스 공국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군림했습니다.베르케 - 몽골 지배자 가운데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인물로, 바그다드를 무너뜨린 사촌 훌라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는 몽골 지배자 가운데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훌라구 - 서아시아 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복하고 페르시아 일대에 일한국을 건국한 몽골 제국의 황족이자 총사령관입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로서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고 아사신파의 본거지를 분쇄하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가 1258년 바그다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세계 전체의 지도자인 칼리프를 죽인 일은 그에게 같은 집안의 일이 아니라 신앙에 대한 공격으로 다가왔다. 혈연으로 묶여 있던 제국에 신앙이라는 새로운 경계선이 그어졌다.

전개 과정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이 죽은 뒤에도 30년 넘게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1259년 대칸 몽케가 원정 도중 갑자기 죽자, 제국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음 대칸을 정하는 규칙은 쿠릴타이 - 쿠릴타이는 몽골과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큰일을 정할 때 여는 회의입니다. 왕족과 부족장, 이름난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음 대칸을 뽑거나 전쟁을 할지 말지를 정했습니다.가장 중요한 일은 대칸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몽골에는 맏아들이 반드시 자리를 잇는다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인정해야 비로소 대칸이 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이 방식에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누가 어디서 회의를 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260년에는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다른 곳에서 따로 쿠릴타이를 열어 둘 다 대칸이 되었고, 이 일이 몽골 제국이 갈라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곧 왕족과 장수들이 모여 뽑는 회의였는데 문제는 누가 어디서 모이느냐였다.

1260년 봄, 남송 전선에 있던 쿠빌라이 -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동생과의 계승 전쟁에서 이겨 대칸이 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다스린 군주입니다.는 서둘러 북쪽으로 돌아와 자기 근거지인 카이핑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이 되었다. 한 달 뒤 수도 카라코룸 - 카라코룸은 1235년 오고타이 칸이 오르혼강 가에 세운 몽골 제국의 수도입니다. 지금의 몽골 하르호린 부근에 있었습니다.초원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먹여 살릴 곡식을 남쪽 농경지에서 실어 와야 했습니다. 이 약점 때문에 1261년 쿠빌라이가 보급로를 막자 성을 지키던 아릭 부케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습니다.세계 곳곳에서 사람이 모여든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잡혀 온 금세공사 기욤 부셰가 은으로 만든 커다란 나무를 궁궐에 세웠는데, 나무의 관에서 포도주와 마유주가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지금은 폐허만 남았고 그 돌로 지은 에르덴 조 사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에서는 막내 아릭 부케 - 톨루이의 막내아들이자 쿠빌라이의 동생으로,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며 형과 대칸 자리를 다투었습니다. 초원의 옛 방식을 지키려는 세력을 대표했습니다.가 따로 쿠릴타이를 열고 역시 대칸이 되었다. 몽골 역사상 처음으로 대칸이 둘이 된 것이다. 양측은 1261년 시무타이 전투 등에서 격렬하게 맞붙었으나 팽팽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에 쿠빌라이는 보급로를 끊는 전략으로 승기를 잡았다. 카라코룸은 초원 한가운데라 식량을 남쪽에서 실어 와야 했는데, 그 길목을 막아 버리자 굶주린 아릭 부케는 결국 1264년 형에게 항복했다.

형제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서쪽에서 또 다른 전쟁이 터졌다. 페르시아를 차지한 훌라구 - 서아시아 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복하고 페르시아 일대에 일한국을 건국한 몽골 제국의 황족이자 총사령관입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로서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고 아사신파의 본거지를 분쇄하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킵차크 초원 - 킵차크 초원(데슈트 이 킵차크)은 서쪽의 다뉴브 강 북쪽에서부터 동쪽의 알타이 산맥 인근까지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대초원입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걸쳐 있으며, 오랫동안 쿠만족과 킵차크족 같은 유목 민족들의 무대였습니다. 초원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옛이야기에 따르면, 이 거대한 풀의 바다에는 바람을 타고 달리는 보이지 않는 정령의 말들이 살고 있어서, 조용한 밤이면 수만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린다고 합니다. 훗날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가 유럽 원정을 마치고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킵차크 칸국(금장 칸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비옥한 풀밭과 끝없는 평원은 말을 키우고 이동하기에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여, 수백 년 동안 강력한 유목 제국의 심장부 역할을 했습니다.베르케 - 몽골 지배자 가운데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인물로, 바그다드를 무너뜨린 사촌 훌라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캅카스 - 코카서스 산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들이 많고 매우 험난해서,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장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산맥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거인 프로메테우스가 그 벌로 이 산맥의 차가운 바위 절벽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았던 전설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또한 깊은 계곡과 험한 숲이 많아, 수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독특한 언어를 쓰며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의 산'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험난한 산맥은 어떤 대군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는 천연 방어 성벽이었습니다. 그러나 1222년,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혹독한 추위와 거친 바위 지형을 극복하고 이 코카서스 산맥을 횡단하는 기적적인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몽골군이 산맥을 넘어 갑자기 나타나자, 산맥 북쪽 초원에 살고 있던 알란족과 쿠만족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의 목초지를 놓고 맞붙은 것이다. 두 사람은 사촌 사이였지만 베르케는 이슬람교도였고,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무너뜨린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1262년 겨울, 훌라구는 데르벤트 - 카스피해 서쪽 연안과 코카서스 산맥 사이에 위치한 좁은 길목으로, 예로부터 남북을 잇는 중요한 군사적, 상업적 통로였습니다. 방어하기 좋은 천연 요새 지형 덕분에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를 지나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다가 이듬해 1월 테렉강 - 테렉강은 캅카스 산맥의 깊은 계곡에서 시작하여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약 620km의 강입니다. 산맥을 가로지르며 흐르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고, 옛날부터 이 지역을 이동하는 사람들과 군대에게 중요한 지리적 경계선이자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1263년 겨울, 몽골 제국의 분열 과정에서 훌라구와 베르케의 군대가 이 강을 두고 큰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시 얼어붙어 있던 강 위로 훌라구의 군대가 후퇴하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수많은 병사와 말들이 얼음물 속으로 빠져 목숨을 잃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전투는 몽골군끼리 벌인 최초의 대규모 내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에서 크게 졌다. 얼어붙은 강 위로 물러나던 훌라구 군대의 발밑에서 얼음이 깨졌고, 많은 병사가 물에 빠졌다고 전한다. 몽골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대패한, 제국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릭 부케가 항복한 뒤에도 초원의 저항은 끝나지 않았다.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 가문이 세운 오고타이 칸국의 지도자 카이두 - 대칸 자리를 빼앗긴 오고타이 가문의 손자로, 중앙아시아에서 30년 넘게 쿠빌라이와 그 후계자에게 맞섰습니다.가 그 중심에 섰다. 카이두는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웠고, 1269년 탈라스에서 다른 왕족들과 만나 대칸의 허락 없이 제국의 땅을 나누는 쿠릴타이를 열었다. 탈라스에 모인 것은 카이두와 바락 - 차가타이 칸국의 칸으로, 카이두 및 일 칸국과 전쟁을 벌이며 독립 세력을 구축하려 한 인물입니다., 킵차크 칸국 - 바투가 볼가강 하류에 세운 유목 국가로, 약 250년 동안 루스 공국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군림했습니다.의 사절이었고 일 칸국 - 훌라구가 페르시아와 중동에 세운 몽골 칸국으로, 이름부터 대칸에게 복종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합의는 마와라안나흐르 -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땅입니다. 마와라안나흐르는 아랍어로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트란스옥시아나도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남부 일대에 해당합니다.두 강에서 끌어온 물 덕분에 사막 한가운데에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자랐고, 이 도시들은 비단길의 중간 기착지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도시의 세금과 상인의 이익이 워낙 컸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갈라진 뒤에는 여러 칸국이 이 땅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었습니다. 1269년 탈라스 쿠릴타이도 결국 이곳의 목초지와 세금을 어떻게 나눌지를 정한 회의였습니다.사마르칸트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합니다. 이 도시를 처음 세운 이가 페르시아 서사시에 나오는 투란의 왕 아프라시압이라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사마르칸트의 옛 도시 터에는 지금도 아프라시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일대) 목초지와 세금을 셋이 나누되, 모자란 몫은 서쪽 호라산에서 얻으라는 것이었다. 칸국끼리의 다툼을 말린 합의가 아니라, 바락의 창끝을 합의에 끼지 않은 일 칸국 쪽으로 돌려놓은 셈이었다. 1270년 바락은 서쪽으로 진군해 헤라트 부근에서 일 칸국의 아바카 - 일 칸국의 제2대 칸으로, 킵차크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으로부터 페르시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와 맞붙었으나, 함께 가기로 한 카이두의 지원군이 싸움 전에 빠져나가면서 크게 패하고 이듬해 죽었다. 이 틈을 타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마저 자신의 지배 아래 두며 막강한 세력을 구축했다.

원나라를 세우고 중국식 황제가 된 쿠빌라이에 맞서, 카이두는 자신이 새로운 칸으로 세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와 연합하여 30년 넘게 치열한 전쟁을 이어갔다. 마침내 1301년, 카이두와 두아의 대군은 옛 수도 카라코룸을 노리고 진군하여 자브항강 - 몽골 서쪽을 흐르는 강으로, 항가이산맥에서 시작해 서북쪽으로 흘러 하르가스 호수로 들어갑니다. 이 강은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내륙의 소금 호수에서 끝나는데, 중앙아시아에는 이런 강이 많습니다.강을 따라 초원과 물웅덩이가 이어져 있어 유목민에게는 가축을 먹이며 지나갈 수 있는 귀한 길이었습니다. 서쪽 알타이 방면에서 옛 수도 카라코룸이 있는 오르혼강 유역으로 가려면 이 물길을 끼고 움직이는 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에, 몽골 제국의 내전 때 군대가 오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1301년 카이두와 두아의 연합군이 카라코룸을 노리고 진군하다가 원나라 군대와 맞붙은 곳도 이 강 일대로 전해집니다.강 이름은 오늘날 몽골의 자브항 아이막(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강물이 시작되는 항가이산맥은 몽골 사람들이 예로부터 '넉넉한 산'이라 부르며 신성하게 여겨, 산과 강의 주인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입니다. 부근에서 원나라 군대와 큰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밀고 밀리는 혈전 끝에 두아는 부상을 입었고, 카이두 역시 다쳐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카이두가 죽자 상황은 크게 뒤집혔다. 두아는 원나라와 몰래 손을 잡고 카이두의 후계자들을 기습해 오고타이 칸국의 영토를 모조리 흡수해 버렸다. 이로써 오고타이 칸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1304년 살아남은 네 나라가 원나라 황제를 명목상 대칸으로 인정하는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내전은 40여 년 만에 끝을 맺었다. 비록 진정한 하나의 제국으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이때부터 원, 차가타이, 일, 킵차크라는 4대 칸국 체제가 굳어지며 동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칭기즈 칸부터 4대 칸국의 창건자들로 이어지는 가계도.
칭기즈 칸부터 4대 칸국의 창건자들로 이어지는 가계도.

주요 사건

1259년

대칸 몽케의 죽음

📍조어성 (지금의 중국 충칭 허촨) (지도 보기)

몽케는 남송의 조어성을 포위하고 여러 달을 보냈다. 산 위에 지은 이 성은 물과 곡식을 안에서 마련할 수 있어 오래 버텼고, 여름 더위 속에 몽골 진영에는 병이 돌았다. 1259년 8월 몽케가 진중에서 죽자 포위는 풀렸고, 각 전선의 왕족들은 원정을 멈추고 후계 다툼으로 돌아섰다.

1260년

두 개의 쿠릴타이 - 쿠릴타이는 몽골과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큰일을 정할 때 여는 회의입니다. 왕족과 부족장, 이름난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음 대칸을 뽑거나 전쟁을 할지 말지를 정했습니다.가장 중요한 일은 대칸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몽골에는 맏아들이 반드시 자리를 잇는다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인정해야 비로소 대칸이 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이 방식에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누가 어디서 회의를 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260년에는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다른 곳에서 따로 쿠릴타이를 열어 둘 다 대칸이 되었고, 이 일이 몽골 제국이 갈라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카이핑(뒷날의 상도)과 카라코룸 (지도 보기)

1260년 봄, 쿠빌라이 -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동생과의 계승 전쟁에서 이겨 대칸이 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다스린 군주입니다.는 남송 전선에서 돌아와 자기 근거지 카이핑에서 쿠릴타이 - 쿠릴타이는 몽골과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큰일을 정할 때 여는 회의입니다. 왕족과 부족장, 이름난 장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음 대칸을 뽑거나 전쟁을 할지 말지를 정했습니다.가장 중요한 일은 대칸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몽골에는 맏아들이 반드시 자리를 잇는다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인정해야 비로소 대칸이 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이 방식에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누가 어디서 회의를 여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1260년에는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다른 곳에서 따로 쿠릴타이를 열어 둘 다 대칸이 되었고, 이 일이 몽골 제국이 갈라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를 열고 대칸에 올랐다. 몽골 본토 밖에서 대칸을 뽑은 첫 사례였다. 한 달 뒤 아릭 부케 - 톨루이의 막내아들이자 쿠빌라이의 동생으로,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며 형과 대칸 자리를 다투었습니다. 초원의 옛 방식을 지키려는 세력을 대표했습니다.는 수도 카라코룸 - 카라코룸은 1235년 오고타이 칸이 오르혼강 가에 세운 몽골 제국의 수도입니다. 지금의 몽골 하르호린 부근에 있었습니다.초원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먹여 살릴 곡식을 남쪽 농경지에서 실어 와야 했습니다. 이 약점 때문에 1261년 쿠빌라이가 보급로를 막자 성을 지키던 아릭 부케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습니다.세계 곳곳에서 사람이 모여든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잡혀 온 금세공사 기욤 부셰가 은으로 만든 커다란 나무를 궁궐에 세웠는데, 나무의 관에서 포도주와 마유주가 흘러나왔다고 전합니다. 지금은 폐허만 남았고 그 돌로 지은 에르덴 조 사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에서 따로 쿠릴타이를 열었다. 대칸이 둘이 되면서 제국은 두 편으로 갈렸다.

1261년

시무타이 전투와 대흥안령 접전

📍시무타이 및 대흥안령 일대 (동몽골)

1261년 아릭 부케가 남쪽으로 내려오자 두 군대의 기병이 시무타이 벌판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병력과 보급에서 앞선 쿠빌라이군이 밀어붙이자 아릭 부케는 초원 안쪽으로 물러났다. 열흘 뒤 대흥안령 부근에서 다시 싸웠으나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고, 정면 대결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과쿠빌라이군 우세, 이후 승부 나지 않음
1261년 – 1262년

카라코룸 보급로 봉쇄

📍카라코룸 (지금의 몽골 하르호린) (지도 보기)

쿠빌라이는 싸워서 이기는 대신 굶기는 길을 골랐다. 초원 한가운데 있는 카라코룸은 식량을 남쪽 농경지에서 실어 와야 했는데, 쿠빌라이가 그 길목을 모두 장악한 것이다. 겨울을 넘기며 아릭 부케의 편에 섰던 장수와 왕족들이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1262년 – 1263년

테렉강 전투

📍테렉강 (지금의 러시아 북캅카스) (지도 보기)

훌라구 - 서아시아 지역을 대대적으로 정복하고 페르시아 일대에 일한국을 건국한 몽골 제국의 황족이자 총사령관입니다. 칭기즈 칸의 손자로서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여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고 아사신파의 본거지를 분쇄하여 역사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데르벤트 - 카스피해 서쪽 연안과 코카서스 산맥 사이에 위치한 좁은 길목으로, 예로부터 남북을 잇는 중요한 군사적, 상업적 통로였습니다. 방어하기 좋은 천연 요새 지형 덕분에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의 좁은 길목을 뚫고 북쪽으로 올라갔으나, 1263년 1월 테렉강 - 테렉강은 캅카스 산맥의 깊은 계곡에서 시작하여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약 620km의 강입니다. 산맥을 가로지르며 흐르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고, 옛날부터 이 지역을 이동하는 사람들과 군대에게 중요한 지리적 경계선이자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1263년 겨울, 몽골 제국의 분열 과정에서 훌라구와 베르케의 군대가 이 강을 두고 큰 전투를 벌였습니다. 당시 얼어붙어 있던 강 위로 훌라구의 군대가 후퇴하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수많은 병사와 말들이 얼음물 속으로 빠져 목숨을 잃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전투는 몽골군끼리 벌인 최초의 대규모 내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에서 베르케 - 몽골 지배자 가운데 처음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인물로, 바그다드를 무너뜨린 사촌 훌라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의 원군에게 포위되었다. 얼어붙은 강 위로 물러나던 중 얼음이 깨져 많은 병사가 물에 빠졌다고 전한다.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으로 후퇴했고, 캅카스 - 코카서스 산맥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들이 많고 매우 험난해서, 옛날 사람들은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장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산맥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거인 프로메테우스가 그 벌로 이 산맥의 차가운 바위 절벽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았던 전설적인 장소가 바로 이곳입니다. 또한 깊은 계곡과 험한 숲이 많아, 수많은 부족이 저마다의 독특한 언어를 쓰며 살아왔기 때문에 '언어의 산'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험난한 산맥은 어떤 대군도 함부로 통과하지 못하는 천연 방어 성벽이었습니다. 그러나 1222년,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혹독한 추위와 거친 바위 지형을 극복하고 이 코카서스 산맥을 횡단하는 기적적인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몽골군이 산맥을 넘어 갑자기 나타나자, 산맥 북쪽 초원에 살고 있던 알란족과 쿠만족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는 두 칸국의 국경으로 굳어졌다.

결과킵차크 칸국 승리
1264년

아릭 부케의 항복

📍상도 (지금의 중국 내몽골 정란기) (지도 보기)

보급이 끊기고 지지자가 흩어지자 아릭 부케는 1264년 상도로 가서 형에게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동생을 죽이지 않았지만, 그를 도운 신하들은 처형되었다. 아릭 부케는 2년 뒤 병으로 죽었고 대칸 자리를 둘러싼 형제 싸움은 끝났다.

휴전 / 공백기 (5년)
1269년

탈라스 쿠릴타이

📍탈라스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도 보기)

카이두 - 대칸 자리를 빼앗긴 오고타이 가문의 손자로, 중앙아시아에서 30년 넘게 쿠빌라이와 그 후계자에게 맞섰습니다., 차가타이 칸국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바락 - 차가타이 칸국의 칸으로, 카이두 및 일 칸국과 전쟁을 벌이며 독립 세력을 구축하려 한 인물입니다., 킵차크 칸국 - 바투가 볼가강 하류에 세운 유목 국가로, 약 250년 동안 루스 공국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군림했습니다.의 사절이 탈라스에 모여 중앙아시아의 목초지와 도시를 어떻게 나눌지 정했다. 대칸 쿠빌라이의 대리인은 없었다. 다만 바락에게는 모자란 몫을 서쪽 호라산에서 얻으라는 단서가 붙어, 이 합의는 곧 일 칸국 - 훌라구가 페르시아와 중동에 세운 몽골 칸국으로, 이름부터 대칸에게 복종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대칸의 허락 없이 제국의 땅을 나눈 이 회의는 제국이 사실상 여러 나라로 갈라졌음을 보여 준다.

1270년

헤라트 전투

📍헤라트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도 보기)

탈라스의 합의를 등에 업고 서쪽으로 나아간 차가타이 칸국의 바락은 1270년 헤라트 부근에서 훌라구의 아들이자 일 칸국의 2대 칸인 아바카 - 일 칸국의 제2대 칸으로, 킵차크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의 침공으로부터 페르시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와 맞붙었다. 아바카는 거짓으로 물러나는 척해 적을 끌어들인 뒤 되돌아 치는 전형적인 몽골식 전술로 크게 이겼다. 패배의 충격 속에 바락이 이듬해 죽자 차가타이 칸국은 지도자를 잃고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 카이두가 자신의 꼭두각시 칸을 세우며 차가타이 칸국 전체를 자신의 영향 아래 두게 되었다.

결과일 칸국 승리
휴전 / 공백기 (31년)
1301년

카라코룸 부근 전투와 카이두의 죽음

📍카라코룸 부근 (지금의 몽골) (지도 보기)

카이두는 자신이 차가타이 칸국의 새로운 칸으로 앉힌 바락의 아들 두아(Duwa)와 함께 옛 수도 카라코룸을 노리고 대군을 모았다. 그러나 원군이 카라코룸 앞을 막아서면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졌고, 어느 쪽도 상대의 대열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양쪽 모두 큰 손해를 입었다. 두아는 이 싸움에서 부상을 당했다. 카이두도 이 무렵 다쳐 곧 세상을 떠났으며, 30년 넘게 이어진 중앙아시아의 저항은 그의 죽음과 함께 힘을 잃었다.

결과결판 없음
1304년 – 1306년

오고타이 칸국의 멸망과 4대 칸국의 평화 조약

📍중앙아시아 일대 (지도 보기)

카이두가 죽은 뒤,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원나라와 동맹을 맺고 옛 주인이었던 오고타이 칸국을 기습하여 영토를 대부분 흡수했다. 1304년, 원, 차가타이, 일, 킵차크 4개 칸국의 군주들은 사절을 교환하고 원나라 황제를 명목상 최고 대칸으로 인정하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비록 실질적인 하나의 제국으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이로써 40년 넘게 이어진 내전이 끝나고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평화)라 불리는 동서 교류의 시대가 열렸다.

예술 및 유산

쿠빌라이 칸 초상

쿠빌라이 칸 초상

아니고 (전칭), 13세기

🏛️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계승 전쟁에서 이겨 원을 세운 대칸의 초상입니다. 몽골 지배자의 흰옷을 입은 모습이지만, 중국식 황제 초상첩에 들어가기 위해 그려졌습니다. 그가 선 두 세계가 한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파이자 (몽골 통행패)

파이자 (몽골 통행패)

몽골 제국 장인, 13~14세기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이 패를 가진 사람은 제국 어디의 역참에서든 말과 식량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몽골 세계를 하나로 묶고 있던 연결망의 실물이며, 내전이 끊어 버린 것도 바로 이 연결망이었습니다.

성문 앞에서 벌어진 기마 전투

성문 앞에서 벌어진 기마 전투

라시드 아드딘, 자미 알 타와리크 (디에즈 앨범), 1300~1325년

🏛️ 디에즈 앨범, 베를린 국립도서관

성문 앞에서 기병들이 뒤엉켜 싸우고, 성벽 위에서는 지키는 사람들이 이를 내려다봅니다. 양쪽 모두 같은 갑옷을 입고 같은 말을 타고 있는데, 몽골군이 몽골군과 싸운 이 내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관련 영상

[#벌거벗은세계사] 쿠빌라이 VS 아릭 부케 대칸 선발전⚔ 쿠빌라이 칸의 중국 통일 이전에는 몽골 집안싸움이 있었다🔥

역사 퀴즈

1 / 10

하나였던 몽골 제국이 안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