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는 1215년 칭기즈 칸의 아들 톨루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 몽케가 대칸이 되자 그는 화북 지역을 맡아 다스렸는데, 이때 유목민의 방식만으로는 농사짓는 사람이 가득한 땅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유병충 같은 한족 학자들을 곁에 두고 세금과 행정 제도를 정비했고, 이런 태도 때문에 초원의 왕족들에게는 '중국에 물든 사람'이라는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1253년 그는 남서쪽의 대리국을 정복해 남송을 뒤에서 감싸는 길을 열었고, 1258년부터는 몽케를 따라 남송 전선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1259년 몽케가 원정 도중 갑자기 죽으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이듬해 그는 서둘러 북쪽으로 돌아와 자기 근거지 카이핑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이 되었고, 한 달 뒤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동생 아릭 부케가 따로 대칸이 되었습니다.
형제 사이의 전쟁은 4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정면 승부로는 결판이 나지 않자 쿠빌라이는 카라코룸으로 가는 식량 보급로를 모두 틀어쥐었습니다. 초원 한가운데 있는 수도는 남쪽에서 곡식을 실어 와야 버틸 수 있었기에, 굶주린 아릭 부케는 1264년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로 대칸의 권위가 온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서쪽의 칸국들은 이미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었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이두가 30년 넘게 그에게 맞섰습니다.
쿠빌라이는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새 수도 대도를 세우고, 1271년 나라 이름을 중국 고전에서 따온 대원으로 고쳤습니다. 1279년 애산 앞바다에서 남송의 마지막 저항이 무너지면서 중국 전체가 그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종이돈을 널리 쓰고 역참을 정비했으며, 티베트 승려 파스파에게 몽골어를 적을 새 글자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 무렵 대도를 찾은 마르코 폴로가 남긴 기록은 유럽 사람들에게 동방에 대한 상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말년의 원정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으로 보낸 함대는 큰 태풍을 만나 무너졌는데, 일본에서는 이 바람을 신이 보낸 바람, 곧 가미카제라고 불렀습니다. 베트남과 자바로 보낸 군대도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아끼던 황후 차부이와 후계자로 삼았던 아들 진김을 잇달아 잃은 뒤 그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고, 1294년 대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칸이면서 동시에 중국식 황제가 되는 길을 고른 그의 선택은 원나라의 뼈대가 되었지만, 제국이 넷으로 갈라지는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