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 몽골 제국은 13세기와 14세기에 존재했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육상 제국입니다. 동아시아의 현재 몽골 지역에서 시작된 몽골 제국은 전성기에 동쪽으로는 일본해에서 서쪽으로는 동유럽 일부까지, 북쪽으로는 북극 일부, 남쪽으로는 인도 아대륙, 동남아시아 본토, 이란 고원, 그리고 서쪽으로는 레반트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뻗어 나갔습니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던 정복 국가였고, 남송 - 송나라는 960년부터 1279년까지 지속된 중국의 왕조입니다. 송 태조가 후주의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으며, 5대 10국 시대를 종식시켰습니다.은 인구 6천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이었다. 두 나라는 금나라를 함께 무너뜨린 동맹이었지만, 1235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이어질 전쟁에 들어갔다. 몽골이 정복한 어떤 나라도 남송만큼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남송이 오래 버틴 비결은 지형과 수군이었다. 초원에서 말을 달리던 몽골 기병에게 남중국은 낯선 땅이었다. 강과 논이 그물처럼 얽혀 있고, 곳곳의 성은 두꺼운 성벽으로 지켜졌으며, 양쯔강 - 양쯔강 혹은 장강(長江)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중국 역사, 특히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 강은 '천험의 요새'라고 불리며 북조의 강력한 기병대가 남하하는 것을 막아주는 천연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589년 수나라가 거대한 함대를 앞세워 이 강을 도하하기 전까지 장강은 남조 왕조들의 생명줄과 같았습니다.에는 남송의 배들이 떠 있었다. 몽골은 정면 돌파 대신 크게 돌아가는 길을 골랐다. 1253년 쿠빌라이 - 칭기즈 칸의 손자로, 동생과의 계승 전쟁에서 이겨 대칸이 되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전체를 다스린 군주입니다.가 이끄는 군대는 지금의 간쑤에서 출발해 티베트 고원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두 달 넘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을 가로막은 것은 물살이 거센 금사강(양쯔강의 상류)이었는데, 몽골군은 양가죽을 부풀려 만든 가죽 부대를 뗏목처럼 엮어 강을 건넜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은 뒷날 '원과혁낭(元跨革囊)', 즉 원나라 군대가 가죽 부대를 타고 강을 건넜다는 말로 남았다. 강을 건넌 군대는 지금의 윈난에 있던 대리국 - 대리국(大理國, 937~1253년)은 지금의 중국 윈난성을 중심으로 쓰촨 남부, 구이저우 서부, 미얀마 북부에 걸쳐 있던 나라입니다. 도읍인 대리는 얼하이 호수와 창산 산맥 사이의 높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의 윈난성 다리시가 그 자리입니다. 산과 협곡으로 둘러싸여 밖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대신, 중국과 티베트, 인도, 동남아시아를 잇는 차마고도(茶馬古道, 차와 말을 실어 나르던 옛 교역로)의 길목이어서 장사가 활발했습니다.이 나라는 백족(바이족)의 지도자 단사평이 앞선 나라인 남조를 이어 세웠고, 300년 넘게 단씨 집안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불교를 매우 중요하게 여겨 '묘향국(妙香國)', 즉 향기로운 부처의 나라라고 불렸습니다. 스물두 명의 왕 가운데 열 명 안팎이 왕위를 스스로 내놓고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뒷날 무협 소설과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도읍에 남아 있는 숭성사 삼탑은 그 시절 불교 문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적입니다.1253년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금사강을 건너 대리를 함락하면서 나라는 막을 내렸습니다. 항복한 마지막 왕 단흥지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자리를 받아 몽골 아래에서 계속 다스렸고, 윈난은 이때부터 중국 왕조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었습니다.의 도읍 대리를 함락했다. 항복한 국왕 단흥지는 목숨을 건지고 그 지역을 계속 다스리는 자리를 받았지만,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재상 고태상은 처형되었다. 쿠빌라이가 북쪽으로 돌아간 뒤에도 장군 우량카다이가 남아 3년에 걸쳐 윈난 일대를 평정했다. 이로써 몽골은 남송을 북쪽에서만이 아니라 남서쪽에서도 감싸는 커다란 포위망을 갖게 되었다.
1258년 대칸 몽케 - 몽골 제국의 행정 체계를 바로세운 개혁가이자 유라시아 양쪽을 휩쓴 대원정을 직접 이끌었던 정복 군주입니다. 1209년에 태어나 1259년 중국 사천성 원정 중 향년 50세로 서거하였습니다.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쓰촨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듬해 조어성 - 중국 충칭시 허촨구에 위치한 남송의 요새입니다. 지형이 험준하여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으로, 몽골 제국의 침략 당시 남송군의 주요 방어선 중 하나였습니다. 1259년 대칸 몽케가 이끄는 몽골군의 거센 공격을 왕견 장군이 끝까지 막아내었으며, 이 공방전 중 몽케가 병사하면서 전 세계로 뻗어나가던 몽골군의 정복 활동이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뒷날 사람들은 이곳을 '신의 채찍이 꺾인 곳'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이라는 작은 산성 앞에서 진격이 멈췄고, 몽케는 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진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칸의 죽음은 세계사의 방향을 바꿨다. 유럽과 중동까지 뻗어 있던 몽골군 지휘관들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고, 남송은 20년의 시간을 벌었다. 뒷날 사람들은 조어성을 '신의 채찍이 꺾인 곳'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내전에서 승리해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전쟁의 방법을 바꿨다. 몽골 기병만으로는 남송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한인 기술자와 항복한 송의 수군을 받아들여 공성전(성을 공격하는 싸움)과 수전을 배웠다. 그 시험대가 한수이강의 요새 도시 양양 - 양양(지금의 중국 후베이성 샹양)은 한수이강 가에 자리 잡은 요새 도시입니다. 한수이강은 양쯔강으로 흘러드는 큰 강이라서, 양양을 차지하면 배를 타고 곧장 남중국의 심장부까지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양양을 '천하의 목구멍'이라고 불렀습니다. 강 건너편의 판청과 짝을 이뤄 서로를 지켜 주었고, 두꺼운 성벽과 넓은 해자(성 둘레에 판 물길) 덕분에 중국에서 가장 함락하기 어려운 성으로 꼽혔습니다.13세기 몽골(원)과 남송은 이 도시를 놓고 5년(1268~1273년)에 걸친 대공방전을 벌였습니다. 남송 수군은 몇 번이고 강의 봉쇄를 뚫고 성안에 물자를 넣었지만, 페르시아 기술자들이 만든 거대한 투석기 회회포가 성벽을 부수면서 결국 성은 항복했습니다. 양양이 열리자 원군은 물길을 따라 남송의 수도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양양은 이야기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간 삼고초려의 무대가 이 부근이고, 무협 소설 '신조협려'에서 곽정과 황용 부부가 몽골군에 맞서 양양성을 지키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합니다.이었다. 양양이 뚫리면 양쯔강이 열리고, 양쯔강이 열리면 남송의 심장부가 드러나는 위치였다. 몽골군은 5년 동안 성을 에워쌌고, 페르시아에서 온 기술자들이 만든 거대한 투석기 회회포 - 회회포는 13세기 몽골(원) 군대가 사용한 거대한 투석기입니다. '회회'는 당시 중국에서 서쪽의 이슬람 세계 사람들을 부르던 말로,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온 기술자 이스마일과 알라웃딘이 만들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같은 원리의 무기를 트레뷰셋이라고 부릅니다.비밀은 지렛대와 무거운 추에 있습니다. 긴 막대의 한쪽 끝에 10톤 가까운 무거운 추를 매달고, 반대쪽 끝에 돌을 얹은 뒤 추를 떨어뜨리면, 지렛대의 힘으로 100킬로그램 가까운 돌이 성벽까지 날아갔습니다. 사람이 줄을 당겨 던지던 예전 투석기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돌을 더 정확하게 던질 수 있었습니다.1273년 양양 공방전에서 회회포가 쏜 돌이 성의 망루를 무너뜨리자 그 소리가 천둥 같아서 성안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년을 버티던 양양이 항복한 데에는 이 신무기의 충격이 컸습니다. 초원의 기마 군단이던 몽골이 페르시아의 기술로 중국의 성을 무너뜨린 것으로, 여러 문명의 기술을 받아들여 전쟁에 활용한 몽골 제국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무기입니다.가 성벽을 부수면서 1273년 양양은 마침내 항복했다.
양양이 무너지자 둑이 터진 듯했다. 총사령관 바얀 - 쿠빌라이 칸이 가장 믿었던 명장으로, 남송 정벌의 마지막 원정을 지휘해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 수도 임안을 파괴 없이 함락시켰습니다.이 이끄는 원군은 양쯔강을 따라 내려가며 1275년 정가주에서 남송의 주력군을 무너뜨렸고, 이듬해에는 큰 싸움 한 번 없이 수도 임안에 들어섰다. 바얀은 성 안에서 약탈하는 자를 엄하게 벌하겠다고 못 박았고, 덕분에 궁궐과 시장, 서고는 거의 파괴되지 않은 채 넘어갔다. 다섯 살의 어린 황제 공제는 할머니인 사태후와 함께 항복 문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문천상 - 수도 함락 뒤에도 끝까지 싸웠고, 쿠빌라이 칸의 온갖 회유를 거부한 채 옥중에서 정기가를 남기고 처형된 충절의 상징입니다., 장세걸, 육수부 - 피난길의 어린 황제를 몇 년간 지키다, 애산의 마지막 해전에서 여덟 살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몸을 던진 남송의 마지막 재상입니다. 같은 신하들은 어린 황자 둘을 데리고 남쪽 바닷가로 빠져나가 저항을 이어갔다. 이들은 푸저우에서 일곱 살의 형 조하를 새 황제로 세웠는데, 이 사람이 단종이다. 그러나 육지에 발붙일 곳을 잃은 조정은 배 위를 떠돌았고, 1278년 단종은 폭풍에 배가 뒤집혀 바다에 빠진 뒤 얻은 병으로 열 살에 세상을 떠났다. 남은 신하들은 그 동생인 여덟 살 조병을 새 황제로 세웠다. 남송의 마지막 황제는 이렇게 궁궐이 아니라 배 위에서 즉위했다.
1279년 3월, 마지막 남은 송의 조정은 광둥 앞바다의 애산에서 원의 함대에 포위되었다. 하루의 격전 끝에 함대가 무너지자, 재상 육수부는 여덟 살의 어린 황제 조병을 등에 업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많은 신하와 병사가 그 뒤를 따랐다고 전해진다. 사로잡힌 문천상은 원나라의 온갖 회유(달래서 자기 편으로 만들려는 것)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정기가'라는 시를 남긴 뒤 처형되었는데, 이 시는 지금까지도 지조의 상징으로 읽힌다. 이렇게 남송은 막을 내렸고,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중국 전체를 다스린 최초의 유목 민족 왕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