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생활을 받아들이려는 서쪽과 초원의 방식을 지키려는 동쪽이 갈라서면서 차가타이 칸국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이 둘로 쪼개진 전쟁입니다. 서쪽에서는 칸 대신 부족장들이 실권을 쥐었고, 그 다툼 속에서 올라온 티무르 - 차가타이 칸국의 한 부족에서 나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정복자입니다.가 1370년 사마르칸트 -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입니다. 712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 정복된 후, 이슬람 학문과 상업의 주요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를 차지하며 새로운 제국의 문을 열었습니다.
위치중앙아시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남부, 키르기스스탄, 중국 신장)
교전국트란스옥시아나 -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땅입니다. 마와라안나흐르는 아랍어로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트란스옥시아나도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남부 일대에 해당합니다.두 강에서 끌어온 물 덕분에 사막 한가운데에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자랐고, 이 도시들은 비단길의 중간 기착지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도시의 세금과 상인의 이익이 워낙 컸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갈라진 뒤에는 여러 칸국이 이 땅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었습니다. 1269년 탈라스 쿠릴타이도 결국 이곳의 목초지와 세금을 어떻게 나눌지를 정한 회의였습니다.사마르칸트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합니다. 이 도시를 처음 세운 이가 페르시아 서사시에 나오는 투란의 왕 아프라시압이라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사마르칸트의 옛 도시 터에는 지금도 아프라시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서차가타이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 모굴리스탄 - 14세기 차가타이 칸국이 동서로 갈라졌을 때 톈산 산맥 북쪽과 동쪽의 초원 지대에 세워진 나라로, '동차가타이 칸국'이라고도 부릅니다.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인들의 땅'이라는 뜻입니다.서쪽 트란스옥시아나가 사마르칸트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과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모굴리스탄의 부족들은 칭기즈 칸 시절의 엄격한 유목 전통(야사)과 천막 생활을 고수했습니다. 이들은 도시에 머물며 농경민처럼 변해가는 서쪽 사람들을 '나약한 자'라며 얕보았고, 반대로 서쪽 사람들은 모굴리스탄 사람들을 거칠고 사나운 '도적(제테)'이라 불렀습니다.투글루그 티무르 칸 때 이슬람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분열된 칸국을 다시 합치려 서쪽으로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서쪽은 티무르가 이끄는 새 제국에 넘겨주었지만, 모굴리스탄은 톈산 산맥과 타림 분지 일대에서 오랫동안 유목 국가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훗날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역시 어머니 쪽으로 모굴리스탄 칸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동차가타이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 카자간 - 1346년 카잔 칸을 몰아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실권을 쥔 부족장으로, 허수아비 칸을 세우고 아미르가 다스리는 서차가타이의 권력 체제를 만들었습니다.과 부족장 세력, 티무르 - 차가타이 칸국의 한 부족에서 나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정복자입니다. 세력
배경 및 맥락
14세기
도시에 살 것인가, 초원에 살 것인가
이 칸국의 분열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둘러싼 갈림길이었다. 서쪽은 도시의 세금과 상업으로 나라를 꾸리려 했고, 동쪽은 가축과 목초지에 기대는 유목 생활을 지켰다. 동쪽 사람들은 서쪽 사람들을 몽골답지 않다고 비웃었고, 서쪽은 동쪽을 거칠다고 여겼다.
14세기
칭기즈 칸의 피라는 자격
실권을 쥐어도 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카자간 - 1346년 카잔 칸을 몰아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실권을 쥔 부족장으로, 허수아비 칸을 세우고 아미르가 다스리는 서차가타이의 권력 체제를 만들었습니다.과 티무르 - 차가타이 칸국의 한 부족에서 나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정복자입니다. 모두 칭기즈 칸의 후손을 칸으로 앉히고 자신은 아미르 - 아랍어로 '명령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로, 이슬람 세계에서 군대의 사령관, 총독, 귀족 부족장, 또는 한 지역을 다스리는 군주를 부르는 높은 칭호입니다. 오늘날 아랍에미리트(UAE)의 '에미르'도 같은 말입니다.몽골 제국과 그 후계 국가들에서는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몽골의 전통에서는 오직 칭기즈 칸의 직계 혈통(황금 씨족)만이 최고 지도자인 '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의 후손이 아니면서도 강력한 군대와 정치적 실권을 쥔 유목 부족장들은 감히 칸을 자처하지 못하고 '아미르'라는 칭호를 썼습니다.14세기 차가타이 칸국이 무너질 때 실권을 쥔 아미르 카자간과 훗날 대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대표적입니다. 티무르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끝내 칸이라 칭하지 않고 아미르로 남았습니다. 대신 칭기즈 칸 가문의 여인과 혼인하여 '황실의 사위(구르간)'라는 칭호를 붙여 자신의 권위를 높였습니다.라는 칭호를 썼다. 티무르는 여기에 더해 칭기즈 칸 가문의 여인과 혼인해 '사위'라는 뜻의 구르간을 이름에 붙여 정통성을 보탰다.
14세기 후반
사마르칸트라는 목표
이 시기 중앙아시아의 싸움은 대부분 사마르칸트 -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입니다. 712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 정복된 후, 이슬람 학문과 상업의 주요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와 부하라를 누가 쥐느냐로 좁혀졌다. 두 도시는 세금과 장인, 상인이 모이는 곳이어서, 초원의 군대라도 이곳을 잃으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전개 과정
차가타이 칸국 - 칭기즈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몫에서 시작된 칸국으로,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오아시스 도시를 다스렸습니다.은 실크로드 - 실크로드(비단길)는 아주 먼 옛날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던 길고 긴 무역로(물건을 사고파는 길)입니다. 중국 한나라 때부터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아주 비싸고 예쁜 '비단'이 서양으로 많이 전해졌기 때문에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상인들은 낙타를 타고 사막과 산을 넘으며 향신료나 보석 같은 물건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나라의 종교나 새로운 기술,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주고받았습니다. 훗날 당나라나 몽골 제국 같은 거대한 나라들은 이 길을 안전하게 지키고 관리하면서 엄청난 부와 힘을 얻었답니다.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나라였다. 서쪽 트란스옥시아나 -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땅입니다. 마와라안나흐르는 아랍어로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트란스옥시아나도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남부 일대에 해당합니다.두 강에서 끌어온 물 덕분에 사막 한가운데에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자랐고, 이 도시들은 비단길의 중간 기착지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도시의 세금과 상인의 이익이 워낙 컸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갈라진 뒤에는 여러 칸국이 이 땅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었습니다. 1269년 탈라스 쿠릴타이도 결국 이곳의 목초지와 세금을 어떻게 나눌지를 정한 회의였습니다.사마르칸트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합니다. 이 도시를 처음 세운 이가 페르시아 서사시에 나오는 투란의 왕 아프라시압이라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사마르칸트의 옛 도시 터에는 지금도 아프라시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에는 사마르칸트 -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입니다. 712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 정복된 후, 이슬람 학문과 상업의 주요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와 부하라 같은 부유한 도시가 있었고, 동쪽에는 톈산 산맥 - 중앙아시아와 중국 신장 지역에 걸쳐 동서로 2,500km 넘게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최고봉인 젱기시초쿠수(승리봉, 7,439m)와 칸 텡그리봉(7,010m)처럼 만년설과 빙하로 뒤덮인 웅장한 봉우리들이 솟아 있습니다. 북쪽의 광활한 유목 초원과 남쪽의 건조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르는 거대한 자연의 성벽 역할을 했습니다.'톈산(천산)'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옛 튀르크와 몽골 유목민들은 이 웅장한 산맥에 하늘의 최고신인 텡그리가 깃들어 있다고 믿어 '텡그리 탁(신의 산)'이라 부르며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고대 중국 전설에서는 서쪽 극락에 살며 먹으면 영원히 늙지 않는 복숭아를 가꾸는 여신 '서왕모'가 사는 아름다운 호수 '요지'가 바로 톈산의 천지(天池)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역사적으로 톈산 산맥 북쪽 기슭의 일리강 계곡과 알말리크 초원은 풀과 물이 풍부하여 유목 제국들의 귀중한 본거지이자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14세기 차가타이 칸국이 둘로 쪼개졌을 때도, 도시 정착 생활을 거부하고 초원의 전통을 지키려 했던 동쪽의 모굴리스탄 칸국이 바로 이 톈산 산맥 주변을 터전으로 삼았습니다.을 낀 넓은 초원이 있었다. 두 세계를 한 나라에 담고 있던 것이 이 칸국의 특징이었는데, 14세기에 들어 그 둘은 서로를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갈등은 칸이 도시에 머무르면서 터졌다. 케벡은 궁을 지어 정착했고 타르마시린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동쪽 부족들은 이를 몽골의 방식을 버린 것으로 보고 1334년 타르마시린을 몰아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여러 칸이 잇달아 바뀌는 혼란이 이어졌다. 뒤이어 자리에 오른 카잔 칸이 부족장들의 힘을 꺾고 권력을 모으려 했으나, 1346년 아미르 카자간 - 1346년 카잔 칸을 몰아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실권을 쥔 부족장으로, 허수아비 칸을 세우고 아미르가 다스리는 서차가타이의 권력 체제를 만들었습니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쓰러뜨렸다. 이 사건으로 서쪽에서는 이름뿐인 칸 뒤에서 부족장들이 실제 정치를 이끌게 되었다. 1340년대를 지나며 칸국은 서쪽 트란스옥시아나와 동쪽 모굴리스탄 - 14세기 차가타이 칸국이 동서로 갈라졌을 때 톈산 산맥 북쪽과 동쪽의 초원 지대에 세워진 나라로, '동차가타이 칸국'이라고도 부릅니다.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인들의 땅'이라는 뜻입니다.서쪽 트란스옥시아나가 사마르칸트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과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모굴리스탄의 부족들은 칭기즈 칸 시절의 엄격한 유목 전통(야사)과 천막 생활을 고수했습니다. 이들은 도시에 머물며 농경민처럼 변해가는 서쪽 사람들을 '나약한 자'라며 얕보았고, 반대로 서쪽 사람들은 모굴리스탄 사람들을 거칠고 사나운 '도적(제테)'이라 불렀습니다.투글루그 티무르 칸 때 이슬람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분열된 칸국을 다시 합치려 서쪽으로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서쪽은 티무르가 이끄는 새 제국에 넘겨주었지만, 모굴리스탄은 톈산 산맥과 타림 분지 일대에서 오랫동안 유목 국가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훗날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역시 어머니 쪽으로 모굴리스탄 칸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1360년 동쪽 모굴리스탄의 투글루그 티무르 - 동쪽 모굴리스탄의 칸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갈라진 차가타이 칸국을 다시 합치겠다며 두 차례 서쪽으로 원정했습니다.가 서쪽을 다시 합치겠다며 시르다리야강 - 톈산 산맥의 만년설에서 흘러나와 비옥한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북서쪽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길이 약 2,200km의 중앙아시아 대하입니다. 남쪽의 아무다리야강과 함께 중앙아시아 문명의 요람인 트란스옥시아나(마와라안나흐르)를 감싸는 두 개의 젖줄 중 하나입니다.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이 강을 '약사르테스(Jaxartes)'라 불렀습니다.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강에 도달한 뒤, 강 건너편의 사나운 유목민 스키타이족을 물리치고 자신의 정복지 맨 북쪽 끝을 기념하기 위해 '가장 먼 알렉산드리아'라는 뜻의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오늘날의 후잔트)를 건설했습니다.역사적으로 시르다리야강 유역은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서 농사를 짓고 큰 도시를 세울 수 있게 해 준 생명수였습니다. 차가타이 칸국과 티무르 제국 시절에도 강을 따라 자리 잡은 도시와 요새들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을 건넜다. 이때 20대 젊은 부족장이던 티무르 - 차가타이 칸국의 한 부족에서 나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정복자입니다.는 침략군에 협조하여 고향 케쉬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투글루그 티무르는 아들 일리아스 호자를 서쪽의 총독으로 앉히고 돌아갔으나, 일리아스 호자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이 커졌다. 결국 티무르는 등을 돌리고 처남인 아미르 후사인 - 실권자 카자간의 손자로 한때 티무르의 동지이자 처남이었으나, 1370년 발흐에서 티무르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습니다.과 손잡아 사막과 산악을 누비며 게릴라 저항을 펼쳤다. 1363년 투글루그 티무르가 사망하자 두 사람은 일리아스 호자의 군대를 동쪽으로 몰아냈다. 모굴리스탄으로 돌아가 칸에 오른 일리아스 호자는 1365년 대군을 이끌고 서쪽을 되찾으려 다시 쳐들어왔다. 티무르와 후사인은 맞서 싸웠으나 진흙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모굴군은 비를 예측하고 기름칠한 가죽과 두꺼운 펠트 - 양이나 가축의 털(양모)에 수분과 열, 압력을 가해 실을 뽑지 않고 엉겨 붙게 만들어 만든 두껍고 질긴 천입니다.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펠트는 생활과 전쟁 모두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습니다.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텐트인 게르(유르트)를 덮는 덮개부터, 방한용 외투, 장화, 모자, 말안장 깔개까지 모두 펠트로 만들었습니다.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 두꺼운 펠트에 기름을 먹이면 물이 스며들지 않는 뛰어난 방수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365년 진흙 전투에서 모굴리스탄 군대는 펠트와 기름칠한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물에 닿으면 아교가 녹아 망가지는 복합궁을 펠트 덮개로 감싸 보호함으로써 폭우 속에서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로 활과 몸을 감싸 전투력을 지켰지만, 무방비였던 연합군은 빗물에 복합궁의 아교가 녹아 활이 무용지물이 되고 젖은 갑옷에 짓눌렸다. 여기에 티무르의 우익이 적을 밀어붙이며 지원을 요청했으나 후사인이 호응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지휘부 분열까지 겹치며 연합군은 만 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 무너졌다.
진흙 전투(1365년): 폭우와 진흙탕 속에서 모굴리스탄 군대에 패배하는 티무르와 후사인의 연합군.
그러나 승리한 일리아스 호자의 모굴군이 사마르칸트를 포위했을 때, 학생과 장인 등 사르바다르라 불린 도시 사람들이 스스로 골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여기에 모굴군 군마 사이에 치명적인 말 전염병인 마역 - 말이나 당나귀 등 말과 동물들 사이에 번지는 치명적인 전염병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 특히 '비저(Glanders)'라는 무서운 세균성 전염병이 대표적입니다.이 병에 걸린 말은 심한 열이 나고 코와 목구멍에서 피고름이 쏟아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며칠 만에 쓰러져 죽게 됩니다. 전염성이 매우 강해서 군대의 군마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군영이나 마구간에 한 번 번지면 수천수만 마리가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했습니다.기병의 빠른 돌격과 이동에 의지하던 중세 유목 군대에게 마역은 칼이나 화살보다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말을 잃은 기병은 싸울 힘을 잃고 꼼짝없이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365년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던 모굴리스탄 군대도 군마의 4분의 3 이상이 마역으로 쓰러지자, 결국 말 안장을 등에 짊어지고 걸어서 초원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비저)이 돌아 말의 4분의 3이 떼죽음을 당하자, 기동력을 잃은 일리아스 호자는 포위를 풀고 초원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사마르칸트 포위전(1365년): 골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모굴군에 맞서 도시를 지켜내는 사르바다르 시민들.
모굴군이 물러가자 트란스옥시아나는 티무르와 후사인 두 사람의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근거지와 성향이 달랐다. 후사인은 아무다리야 - 아무다리야 강(고대 옥수스 강)은 중앙아시아의 대표적인 대하입니다. 서쪽·북서쪽으로 흘러 아랄해 분지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유목 세력과 정주 국가 사이의 전략 이동로와 경계 지대 역할을 했습니다.강 남쪽의 발흐 -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매우 오래된 역사 도시로, 고대 그리스어로는 박트라(Bactra)라고 불렸습니다. 동서 실크로드의 핵심 교차로에 자리 잡아 '도시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가졌습니다.고대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가 이곳에서 가르침을 폈다고 전합니다. 1370년 티무르가 경쟁자 아미르 후사인을 굴복시키고 집권한 역사적인 공방전의 무대이기도 합니다.와 쿤두즈를 근거지로 삼아 허수아비 칸을 세우고 최고 권력을 쥐려 했고, 거대한 성채를 짓기 위해 도시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반면 티무르는 고향 케쉬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상인과 학자들의 환심을 사며 지지 세력을 넓혔다. 서차가타이의 패권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수년간 밀고 당기는 싸움이 이어졌다. 마침내 1370년, 후사인의 가혹한 통치에 등을 돌린 유력 부족장들과 군대를 이끌고 티무르가 남하하여 후사인의 본거지인 발흐 성을 포위했다. 성안의 지휘관들마저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후사인은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칭기즈 칸의 혈통이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 대신 아미르를 칭했지만,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새 제국의 문을 열었다. 차가타이 칸국의 서쪽은 그렇게 티무르 제국 - 14세기 후반 정복자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세운 제국으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아우르며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습니다.이 되었고, 동쪽 모굴리스탄은 이후로도 오래 이어졌다.
부족장들의 힘을 꺾으려던 카잔 칸에 맞서 아미르 카자간 - 1346년 카잔 칸을 몰아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실권을 쥔 부족장으로, 허수아비 칸을 세우고 아미르가 다스리는 서차가타이의 권력 체제를 만들었습니다.이 군사를 일으켰다. 첫 싸움에서는 졌지만 물러나 세력을 모은 뒤 다시 공격해 칸을 죽였다. 이후 서쪽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손을 이름뿐인 칸으로 세우고 부족장이 다스리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칸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칸국은 두 세계로 갈라졌다. 서쪽 트란스옥시아나 -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땅입니다. 마와라안나흐르는 아랍어로 '강 너머의 땅'이라는 뜻이고, 그리스·로마식 이름인 트란스옥시아나도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남부 일대에 해당합니다.두 강에서 끌어온 물 덕분에 사막 한가운데에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오아시스 도시가 자랐고, 이 도시들은 비단길의 중간 기착지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도시의 세금과 상인의 이익이 워낙 컸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갈라진 뒤에는 여러 칸국이 이 땅을 서로 차지하려 다투었습니다. 1269년 탈라스 쿠릴타이도 결국 이곳의 목초지와 세금을 어떻게 나눌지를 정한 회의였습니다.사마르칸트에는 오래된 전설이 전합니다. 이 도시를 처음 세운 이가 페르시아 서사시에 나오는 투란의 왕 아프라시압이라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사마르칸트의 옛 도시 터에는 지금도 아프라시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는 도시와 상업에 기대는 지역이 되었고, 동쪽 톈산 일대는 모굴리스탄 - 14세기 차가타이 칸국이 동서로 갈라졌을 때 톈산 산맥 북쪽과 동쪽의 초원 지대에 세워진 나라로, '동차가타이 칸국'이라고도 부릅니다. '모굴리스탄'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인들의 땅'이라는 뜻입니다.서쪽 트란스옥시아나가 사마르칸트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과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모굴리스탄의 부족들은 칭기즈 칸 시절의 엄격한 유목 전통(야사)과 천막 생활을 고수했습니다. 이들은 도시에 머물며 농경민처럼 변해가는 서쪽 사람들을 '나약한 자'라며 얕보았고, 반대로 서쪽 사람들은 모굴리스탄 사람들을 거칠고 사나운 '도적(제테)'이라 불렀습니다.투글루그 티무르 칸 때 이슬람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분열된 칸국을 다시 합치려 서쪽으로 진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서쪽은 티무르가 이끄는 새 제국에 넘겨주었지만, 모굴리스탄은 톈산 산맥과 타림 분지 일대에서 오랫동안 유목 국가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훗날 인도에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 역시 어머니 쪽으로 모굴리스탄 칸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습니다.이라 불리며 유목 생활을 지켰다. 두 지역은 이후 서로를 다른 나라로 여겼다.
모굴리스탄의 투글루그 티무르 - 동쪽 모굴리스탄의 칸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갈라진 차가타이 칸국을 다시 합치겠다며 두 차례 서쪽으로 원정했습니다.는 두 차례 남하해 손쉽게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하고 아들 일리아스 호자를 총독으로 남겼다. 그러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한 티무르 - 차가타이 칸국의 한 부족에서 나와 중앙아시아를 통일하고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은 정복자입니다.와 후사인 - 실권자 카자간의 손자로 한때 티무르의 동지이자 처남이었으나, 1370년 발흐에서 티무르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습니다.이 게릴라전을 펼쳤고, 1363년 투글루그 티무르가 사망하자 두 사람은 일리아스 호자를 동쪽으로 몰아냈다.
티무르와 후사인이 일리아스 호자의 군대를 막아섰다. 모굴군은 폭우를 예상하고 기름칠한 가죽과 펠트 - 양이나 가축의 털(양모)에 수분과 열, 압력을 가해 실을 뽑지 않고 엉겨 붙게 만들어 만든 두껍고 질긴 천입니다.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들에게 펠트는 생활과 전쟁 모두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습니다.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는 텐트인 게르(유르트)를 덮는 덮개부터, 방한용 외투, 장화, 모자, 말안장 깔개까지 모두 펠트로 만들었습니다.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릴 때 두꺼운 펠트에 기름을 먹이면 물이 스며들지 않는 뛰어난 방수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365년 진흙 전투에서 모굴리스탄 군대는 펠트와 기름칠한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물에 닿으면 아교가 녹아 망가지는 복합궁을 펠트 덮개로 감싸 보호함으로써 폭우 속에서도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로 활과 체온을 보호했으나, 무방비였던 연합군은 빗물에 활의 아교가 녹고 젖은 갑옷에 짓눌렸다. 여기에 티무르의 지원 요청을 후사인이 거부하는 지휘부 분열까지 겹쳐 1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참패했다.
지킬 군대도 지도자도 없던 사마르칸트 -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입니다. 712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 정복된 후, 이슬람 학문과 상업의 주요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에서 학생과 장인 등 도시 사람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었다. 이들은 좁은 골목 입구를 막아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지붕 위에서 활을 쏘아 기병의 돌격을 봉쇄했다. 여기에 모굴군 군마 사이에 치명적인 말 전염병(마역 - 말이나 당나귀 등 말과 동물들 사이에 번지는 치명적인 전염병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 특히 '비저(Glanders)'라는 무서운 세균성 전염병이 대표적입니다.이 병에 걸린 말은 심한 열이 나고 코와 목구멍에서 피고름이 쏟아져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며칠 만에 쓰러져 죽게 됩니다. 전염성이 매우 강해서 군대의 군마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군영이나 마구간에 한 번 번지면 수천수만 마리가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했습니다.기병의 빠른 돌격과 이동에 의지하던 중세 유목 군대에게 마역은 칼이나 화살보다 무서운 재앙이었습니다. 말을 잃은 기병은 싸울 힘을 잃고 꼼짝없이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365년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던 모굴리스탄 군대도 군마의 4분의 3 이상이 마역으로 쓰러지자, 결국 말 안장을 등에 짊어지고 걸어서 초원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이 번져 말이 떼죽음을 당하자, 모굴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무거운 세금으로 인심을 잃은 후사인은 발흐 -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매우 오래된 역사 도시로, 고대 그리스어로는 박트라(Bactra)라고 불렸습니다. 동서 실크로드의 핵심 교차로에 자리 잡아 '도시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가졌습니다.고대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로아스터교와 불교, 이슬람 학문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자라투스트라가 이곳에서 가르침을 폈다고 전합니다. 1370년 티무르가 경쟁자 아미르 후사인을 굴복시키고 집권한 역사적인 공방전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성에 의지했으나, 성안의 지휘관들이 잇달아 티무르 쪽으로 넘어가면서 방어가 무너졌다. 후사인은 붙잡혀 죽었다.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않고 아미르라 하면서도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삼아 새 제국의 기초를 놓았다.
결과티무르 승리
예술 및 유산
구르 아미르 (티무르의 무덤)
티무르 제국 장인들, 15세기 초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현지 보존)
티무르의 무덤 위에 얹힌 청록색 주름 돔입니다. 정복한 도시에서 데려온 장인들이 지었기 때문에, 이 건물 하나에 페르시아와 인도 등 여러 곳의 기법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타일로 쓴 정복자의 이력서인 셈입니다.
차가타이 칸국의 은화
차가타이 칸국 조폐소, 14세기
🏛️ 각국 화폐 컬렉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알말리크에서 찍은 동전들입니다. 누구의 이름이 어떤 글자로 새겨졌는지를 따라가면 칸국이 갈라지는 과정이 그대로 보입니다. 허수아비 칸과 실권자 아미르, 갈라선 수도들이 모두 금속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사마르칸트 레기스탄 광장
티무르 제국 장인들, 15세기 이후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현지 보존)
티무르가 수도로 삼은 도시 한복판의 마드라사(이슬람 학교) 광장입니다. 그중 한 건물에는 호랑이와 사람 얼굴을 한 해가 타일로 그려져 있는데, 이슬람 건축에서는 드문 일이며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전통이 만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티무르의 사절 접견 (발흐 공방전)
미르크반드의 《라우자트 알-사파》 필사본 세밀화가, 1599년경 (16세기)
🏛️ 필사본 컬렉션 (터키/네덜란드 소장)
1370년 발흐를 공격하던 당시 티무르가 아미르 후세인의 사절을 접견하는 장면을 묘사한 세밀화입니다. 16세기 역사가 미르크반드의 《라우자트 알-사파》(순결의 정원, 1599년 필사본)에 수록되어 있으며, 트란스옥시아나의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기 직전 티무르의 위세를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