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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제국 해군 원수 / 연합함대 사령장관

일본 제국 1884년 ~ 1943년 (나이: 59세)
"만약 싸우라는 명령이 내려진다면 첫 6개월에서 1년 동안은 거세게 몰아붙여 보겠지만, 전쟁이 2년, 3년으로 길어진다면 나는 승리를 전혀 장담할 수 없다."
— 1940년 가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미국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해군의 전망을 묻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미국의 압도적인 공업력을 경고하며 남긴 답변에서.

생애

야마모토 이소로쿠(Isoroku Yamamoto, 1884~1943)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총수인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습과 미드웨이 해전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미국 유학 경험을 통해 미국의 막강한 산업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대미 전쟁에 반대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반대한 전쟁의 선봉에 서서 태평양 전쟁을 지휘해야 했던 복합적인 군인이었습니다.

미국의 산업력을 목격한 유학생과 항공모함 전력의 선구자

일본 니가타현 나가오카의 가난한 옛 사무라이 가문에서 아버지 나이가 쉰여섯 살('이소로쿠')이던 해에 태어나 '이소로쿠'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1905년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에 소위로 참전했다가 포탄 폭발로 왼손 검지와 중지 손가락 두 개를 잃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1919년부터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해군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야마모토는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텍사스의 끝없는 유전 지대와 디트로이트의 거대한 포드 자동차 공장을 직접 둘러본 그는 전쟁이란 결국 국가 전체의 산업 생산력과 자원의 싸움임을 절감했습니다. 또한 미래의 해전은 대포를 쏘는 거대한 전함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항공모함이 지배할 것이라 확신하고 일본 해군 항공대 육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대미 전쟁 반대와 진주만 기습의 모순

1930년대 후반 일본 육군과 해군 강경파가 나치 독일·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고 미국·영국과의 전쟁으로 치닫자, 해군 차관이던 야마모토는 암살 위협을 무릅쓰고 삼국 동맹과 대미 개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일본과 미국의 공업 생산력이 열 배 이상 차이 나기 때문에 미국과 전면전을 벌이면 일본이 결코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1939년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된 뒤 결국 내각과 군 수뇌부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자, 야마모토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유일한 승산이라 여긴 극단적인 선제타격 작전을 세웠습니다. 미국과 장기전을 벌이면 반드시 패배하므로, 개전 첫날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해 하와이 진주만의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궤멸시켜 미국 국민의 전의를 꺾고 조기 강화 협상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은 전술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으나, 정작 미군의 항공모함들을 놓친 데다 기습에 격분한 미국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 야마모토가 가장 두려워했던 총력전의 시작을 부르고 말았습니다.

미드웨이의 참패와 솔로몬 상공에서의 최후

개전 직후 6개월 동안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을 석권한 야마모토는 남아 있는 미 해군 항공모함들을 유인해 완전히 격멸하고자 1942년 6월 중앙 태평양의 미드웨이 환초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암호(JN-25)를 이미 해독하고 매복해 있던 미 해군 급강하 폭격기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아카기·카가·소류·히류 등 핵심 항공모함 4척과 숙련된 조종사들을 하루아침에 잃으며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로 전세가 더욱 기울자, 야마모토는 최전방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1943년 4월 18일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섬으로 비행 시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부 비행 일정이 담긴 암호 전문을 미 해군 정보국이 또다시 해독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미 육군 항공대 P-38 라이트닝 장거리 전투기 편대가 정글 상공에서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정확히 요격해 격추시키면서 59세의 나이로 전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