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방군 원수 /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
"땀을 많이 흘리면 피를 덜 흘리게 되고, 피를 덜 흘리면 눈물도 덜 흘리게 된다. 그리고 두뇌를 쓰면 그 모든 것을 아낄 수 있다."— 사막 전선과 사관학교 교관 시절, 철저한 훈련과 기동·기만 전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긴 롬멜의 어록에서.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1891~1944)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 침공과 북아프리카 사막 전선에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대담한 기갑 기동전을 펼쳐 연합군으로부터도 '사막의 여우(Desert Fox)'라 불렸던 독일 국방군 원수입니다.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하이덴하임에서 중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난 롬멜은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뛰어난 현장 감각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의 카포레토 전투에서 소수의 산악 보병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침투해 이탈리아군 수천 명의 항복을 받아내며 독일 최고 무공훈장인 '푸르 르 메리트'를 받았습니다. 전간기에는 자신의 전투 경험을 정리한 전술 교범 《보병 공격》을 펴냈고,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아돌프 히틀러의 눈에 띄어 총통 경호대장을 거쳐 기갑사단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제7기갑사장을 맡은 롬멜은 항상 최전선 지휘 차량에 직접 타고 선두에서 진격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사단은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아군 사령부조차 현재 위치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여서 '유령 사단(Ghost Division)'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영불 해협까지 단숨에 돌파하며 프랑스의 조기 항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41년 초, 북아프리카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에게 궤멸될 위기에 처하자 히틀러는 롬멜에게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맡겨 리비아로 급파했습니다. 도착 직후 방어만 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곧바로 공세로 나선 롬멜은 트럭 뒤에 비행기 프로펠러를 달아 모래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전차 부대가 몰려오는 것처럼 속이고, 강력한 88mm 대공포를 평사포처럼 눕혀 영국군 중전차를 격파하는 등 기발한 전술로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어붙였습니다.
1942년 6월에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영국의 요새 토브루크를 함락시키며 50세의 나이에 최연소 육군 원수로 진급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 해상 보급로를 영국 해군과 공군에 차단당한 아프리카 군단은 만성적인 연료와 탄약 부족에 시달렸고, 결국 1942년 가을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영국 제8군과의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한 뒤 튀니지로 후퇴했습니다.
1943년 말 서유럽 해안 방어를 점검하는 임무를 맡은 롬멜은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노르망디를 비롯한 해안선에 수백만 개의 지뢰와 철제 장애물을 설치하며 '대서양 방벽'을 강화했습니다. 그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군력 때문에 기갑사단을 해안 바로 뒤에 배치해 상륙 첫날 바다로 밀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와 상급 사령부가 전차 부대를 내륙에 묶어 두면서 1944년 6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을 막지 못했습니다.
서부 전선의 패색이 짙어지자 독일이 파멸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 롬멜은 반히틀러 장교들과 접촉했습니다. 1944년 7월 17일 노르망디 전선 시찰 중 영국 공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아 두개골 골절의 중상을 입은 그는 사흘 뒤 일어난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 인물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국민적 영웅이었던 롬멜을 공개 재판에 넘기면 군과 국민의 사기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히틀러는 그에게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가족과 부하들까지 처벌받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명예로운 국장을 치를 것인가'를 선택하게 했고, 롬멜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1944년 10월 14일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고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