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 총리 / 국가 파시스트당 지도자(두체)
"평화 협상 테이블에 승전국으로 앉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수천 명의 전사자 명단뿐이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기 직전, 전쟁 준비가 부족하다는 이탈리아군 참모총장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강행하며 한 말로 전해지는 기록에서.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이탈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파시즘(Fascism)'이라는 전체주의 독재 체제를 만들고,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손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이자 독재자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프레다피오에서 사회주의자였던 대장장이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무솔리니는 젊은 시절 교사와 사회주의 정당 기관지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웅변과 선동 글솜씨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반전 입장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참전을 강력히 주장하다 사회당에서 제명되었고, 직접 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입은 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음에도 약속받은 영토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불구의 승리'라는 불만과 극심한 물가 폭등, 실업난에 시달렸습니다.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속간(파시스)에서 이름을 딴 '파시스트당'과 퇴역 군인 중심의 준군사 조직 '검은 셔츠단'을 결성해 파업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며 자본가와 중산층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어 1922년 10월 수만 명의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행진하는 '로마 진군'으로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압박해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총리에 임명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무솔리니는 반대파 정치인을 탄압하고 언론과 노동조합을 통제하며 의회 민주주의를 해체했습니다. 스스로를 '두체(Duce, 지도자)'라 칭한 그는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구호 아래 학교 교육부터 일상생활까지 국가가 통제하는 전체주의 체제를 세웠습니다. 그의 권력 장악 방식과 대중 집회 연출은 당시 독일에서 세력을 키우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직접적인 모범이 되었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처럼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마레 노스트룸)'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무솔리니는 1935년 국제연맹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병합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프랑스와 사이가 멀어지자 나치 독일과 급격히 가까워졌고, 스페인 내전에 개입한 데 이어 1939년 독일과 군사 동맹인 '강철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이탈리아는 군수 물자와 현대식 전차·항공기가 턱없이 부족해 당장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의 전격전에 무너지자, 전후 전리품 분배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한 무솔리니는 서둘러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어 히틀러와 상의도 없이 그리스를 침공하고 북아프리카의 영국령 이집트로 진격했으나, 열악한 장비와 보급 부족으로 연이어 대패하며 결국 독일군의 구원에 의존하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고 로마가 폭격당하자, 파시스트 대평의회와 국왕은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했습니다. 얼마 뒤 독일 공수부대의 기습 구출 작전으로 풀려난 그는 독일군이 점령한 북부 이탈리아에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살로 공화국)'을 세웠으나 실권 없는 명목상의 수반에 불과했습니다. 1945년 4월 연합군이 북부 이탈리아까지 진격하자 독일군 군복으로 변장하고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던 무솔리니는 코모 호수 인근에서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저항군(파르티잔)에게 발각되어 총살당했고, 그의 시신은 밀라노의 로레토 광장에 매달리며 20여 년간의 파시스트 독재도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