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5대 10국 시대 전해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왕조로, 경제적 안정과 불교 문화의 융성을 이루었습니다.
초는 5대 10국 시대 마은이 호남성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차 무역을 통해 번성했습니다.
전촉은 5대 10국 시대 왕건이 사천 지방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로, 풍부한 물자와 평화로운 통치 덕분에 예술과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형남(남평)은 5대 10국 중 가장 작은 나라로, 강릉을 중심으로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 생존을 도모했습니다.
후한(947~951년)은 5대 10국 시대 중원을 차지했던 5개의 왕조 중 가장 짧은 단 4년의 수명을 기록한 비운의 왕조입니다. 하지만 그 짦은 존속 기간 안에는 외세의 침략과 군벌의 야망, 그리고 궁중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등 이 시대의 모든 혼란이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후한의 창건자인 유지원(고조)은 사타족 출신의 노련한 절도사로, 본래 이전 왕조인 후진을 섬기던 강력한 군벌이었습니다. 후진의 황제가 '아들 황제'라는 굴욕적인 지위에서 벗어나고자 거란(요나라)에 반기를 들자, 분노한 거란의 황제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947년, 중원을 차지한 거란군은 한족들의 맹렬한 저항과 더위에 시달렸고, 보급마저 끊기자 결국 중원 지배를 포기하고 황급히 북쪽 초원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율덕광마저 병사하면서 중원에는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태원(진양)에서 군사력을 온존하고 있던 유지원이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끌고 텅 빈 개봉으로 진격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후한을 건국했습니다. 그는 전란에 휩싸인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개국공신들과 여러 절도사들을 다독이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 했으나, 불행히도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인 948년에 병으로 급사하고 맙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갓 태어난 제국에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제위는 유지원의 10대 아들인 유승우(은제)에게 돌아갔으나, 어리고 경험이 없던 새 황제는 아버지가 남겨둔 강력하고 노련한 개국공신들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측근들의 이간질에 흔들린 은제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기둥이었던 충신들을 하나둘씩 숙청하는 끔찍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이 맹목적인 의심과 공포가 결국 후한의 명줄을 끊고 말았습니다. 은제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자 가장 충성스러웠던 장군 곽위마저 제거하려 했고, 수도 개봉에 남아있던 곽위의 일가친척들을 몰살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루아침에 처자식을 모두 잃고 분노에 휩싸인 곽위는 즉각 군대를 돌려 수도 개봉으로 진격했습니다. 951년, 곽위의 정예군은 손쉽게 수도를 장악했고, 도망치던 은제가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후한은 건국 4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후한은 중원을 지배했던 마지막 사타족 왕조였으며,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자멸은 곽위가 한족 왕조인 후주를 세우고 훗날 천하 통일의 기틀을 닦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진(936~947년)은 5대 10국 시대의 세 번째 왕조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재앙적인 외교적 결정을 내린 국가로 영원히 악명을 남겼습니다. 후진은 후당의 유력한 사타족 출신 절도사였던 석경당의 반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란 중 후당군의 반격에 밀려 궁지에 몰린 석경당은 북방의 강력한 유목 제국인 거란(요나라)의 황제 야율덕광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매우 극단적인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거란의 막강한 기병대를 빌려 후당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대가로, 석경당은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거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며 스스로를 '아들 황제(아황제)'로 낮추는 엄청난 굴욕을 감수했습니다. 또한 매년 막대한 양의 비단과 금은보화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대가는 바로 만리장성 이남의 핵심 전략 요충지인 '연운 16주(현재의 베이징과 허베이, 산시성 북부 일대)'를 거란에 영구히 할양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중원은 천혜의 방어선인 험준한 산맥과 성벽을 모두 잃었고, 북방 유목민의 기병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언제든 화북 평야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향후 400년 동안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안보적 재앙을 낳았습니다. 석경당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거란에 굽실거리며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조카인 석중귀(출제)가 황위에 오르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거란에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던 석중귀는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거란 황제에게 '신하'가 아닌 '손자'로서만 대우하겠다고 선언하며 무모하게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거란 황제는 대규모 징벌군을 이끌고 쳐내려왔고, 연운 16주라는 방어막이 없었던 후진은 거란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947년, 거란군이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포로로 끌고 가면서 후진은 건국 11년 만에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중원은 또다시 끔찍한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주전충이 세운 5대 중 첫 번째 왕조입니다. 황허 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원 지역을 지배했으나, 훗날 이존욱이 이끄는 후당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후촉(934~965)은 5대 10국 중 하나로, 사천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후당(923~937년)은 5대 10국 시대 화북 지방을 지배했던 두 번째 왕조이자,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국가입니다. 후당의 뿌리는 돌궐계 유목민인 사타족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의 전설적인 지도자 이극용은 애꾸눈 때문에 '독안룡(獨眼龍)'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온몸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 흑마를 타 적들에게 절대적인 공포를 안겨주었던 정예 기병대 '아군(鴉軍, 까마귀 군대)'을 이끌었습니다. 비록 이극용은 후량을 세운 주전충과 평생에 걸친 핏빛 복수전을 벌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그의 원대한 꿈은 천재적인 전술가였던 아들 이존욱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이존욱은 923년, 아버지의 검은 기병대를 이끌고 후량을 완전히 멸망시킨 뒤 당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명분 아래 후당을 건국했습니다. 즉위 초반의 이존욱은 파죽지세로 화북 지방을 통일하고 촉 땅의 전촉까지 정벌하며 후당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신과 같았던 그는 황궁에서는 최악의 군주였습니다. 그는 연극과 예술에 광적으로 집착하여 황제임에도 직접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쳤고, 자신이 총애하는 배우들에게 최고위 관직을 하사하며 평생을 함께 싸운 장군들을 홀대했습니다. 이러한 기행은 결국 군대의 거대한 분노를 샀고, 926년 일어난 대규모 반란 속에서 눈먼 화살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의형제였던 이사원(명종)이 황위를 이어받아 혼란을 수습하고 농업 장려와 인쇄술 보급 등을 통해 잠시나마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명종 사후 후당은 다시 끔찍한 황위 계승 투쟁에 휩싸였고, 결국 불만을 품은 장수 석경당이 거란(요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여 조국을 무너뜨리면서 건국 1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후주(951~960년)는 5대 10국 시대 북방 중원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5개의 왕조 중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고 찬란했던 국가입니다. 앞선 왕조들이 주로 돌궐계 사타족 출신의 군벌들에 의해 세워졌던 것과 달리, 후주는 한족 출신의 명장 곽위(태조)가 단명한 후한을 무너뜨리고 건국했습니다. 곽위는 즉위 후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며, 무너진 국가 행정 시스템을 재건하는 등 북방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후주를 진정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은 그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종 시영이었습니다. 시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비전 있는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0년은 천하를 개척하고, 10년은 백성을 기르며, 10년은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는 원대한 30년 천하 통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영은 가장 먼저 국방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쳤습니다. 지방 군벌들의 사병처럼 전락했던 군대를 국가에 충성하는 정예병으로 재편하고 중앙집권적인 군사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수리 사업을 크게 장려했으며, 국가에 부족한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대규모로 불교 사찰들을 폐쇄하고 불상의 구리를 녹여 동전을 만드는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내실을 바탕으로 후주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954년 고평 전투에서는 아군이 밀리는 와중에도 황제인 시영이 직접 화살이 빗발치는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맹을 발휘하며 북한과 거란(요나라) 연합군을 대파했습니다. 이후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부유한 남당과 후촉의 영토를 크게 빼앗아 엄청난 경제적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마침내 시영이 가장 숙원 하던 거란 정벌에 나서 연운 16주 중 일부를 수복하던 중, 959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병사하고 맙니다. 7살의 어린 아들이 황위를 잇자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불과 1년 뒤인 960년, 시영이 가장 신임하던 근위군 대장 조광윤이 진교병변을 통해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비록 후주는 10년도 채 존속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곽위와 시영이 피땀 흘려 다져놓은 강력한 군사력과 풍요로운 경제력은 고스란히 조광윤에게 넘어가 송나라가 70년의 분열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는 완벽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요나라(916~1125년)는 거란족이라 불리는 초원의 말타는 영웅 야율아보기가 세운 강력한 나라입니다. 동북아시아의 넓은 풀밭에서 시작한 거란족은 자신들의 유목 생활 습관과 한족들의 농사짓는 문화를 아주 지혜롭게 섞어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북아시아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습니다. 전성기 요나라는 오늘날의 몽골 초원과 만주 땅, 그리고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북쪽 요충지인 연운 16주 지역까지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졌습니다. 요나라가 이렇게 큰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비결은 북면관과 남면관이라는 이원 통치 체제 덕분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법을 적용해 다스리고,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은 중국식 법에 따라 다스려 서로의 다른 생활 방식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요나라는 깊은 불교 신앙을 가졌던 나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크고 아름다운 절과 높은 목탑, 정교한 불상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요나라는 비록 나중에 새로 일어난 금나라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거란이라는 이름은 서양에 널리 알려져 오랜 시간 동안 중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 캐세이(Cathay)의 어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요나라를 처음 세운 야율아보기에 대해서는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온 방 안이 기이하고 달콤한 향기와 밝은 빛으로 가득 찼으며, 태어나자마자 스스로 걸어 다니며 어른처럼 영리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자란 뒤 하늘을 날아다니던 거대한 신룡을 화살 한 발로 쏘아 떨어뜨렸다는 신화도 전해져 내려오며, 이는 그가 초원을 다스릴 신령스러운 힘을 가졌음을 상징합니다.
민은 5대 10국 시대 왕심지가 복건성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북한(951~979년)은 5대 10국 시대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국가이자, 작지만 매우 끈질기게 저항했던 왕조입니다. 후한을 건국한 유지원의 동생인 유민(유숭)이, 곽위의 후주에 의해 후한이 멸망하자 산서 지방의 험준한 지형을 방패 삼아 태원에서 세운 나라입니다. 영토는 좁고 자원은 부족했으나, 북방의 강자인 거란(요나라)에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며 그들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 30년 가까이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특히 수도인 태원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후주와 송나라의 수많은 대규모 공격을 버텨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북한은 고평 전투에서 거란과 연합해 후주를 위협하는 등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결국 979년, 송나라의 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태원을 포위 공격한 끝에 마침내 항복을 받아내면서, 70여 년에 걸친 분열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송나라에 의한 천하 통일이 완성되었습니다.
기는 5대 10국 시대 이무정이 서북부 봉상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송나라는 960년부터 1279년까지 지속된 중국의 왕조입니다. 송 태조가 후주의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으며, 5대 10국 시대를 종식시켰습니다.
남한(917~971)은 5대 10국 시대 중국 남해안의 광동과 광서 지역을 지배했던 왕조입니다. 당나라 말기 절도사였던 유은의 기반을 바탕으로, 그의 동생 유암이 광주(번우)를 수도로 삼아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대월'이라 했으나, 이후 한나라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의지로 '대한(남한)'으로 바꾸었습니다.
남한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수도 광주는 당시 아랍 상인들과 동남아시아 각국이 드나드는 거대한 국제 항구였으며, 상아, 코뿔소 뿔, 공작 깃털 같은 진귀한 물건들이 활발하게 거래되었습니다. 특히 '청지'라 불리는 남해의 진주 채취 산업이 발달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황제들은 이 부를 바탕으로 금과 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궁전과 정원을 지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독특하고도 잔혹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남한의 황제들은 사대부들을 믿지 못해 조정의 관리들을 거세하여 내시(환관)로 만들었으며, 그 수가 무려 2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기이한 통치 방식과 더불어 매우 엄격하고 잔인한 형벌을 집행하여 공포 정치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내부적인 모순과 행정의 부패로 인해 점차 국력이 약해졌고, 971년 북방에서 내려온 송나라의 대군에게 항복하며 멸망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마지막 황제 유창은 도망칠 때 보석을 가득 실은 배를 준비했지만, 평소 믿었던 내시들이 보석만 챙겨 도망가는 바람에 빈손으로 송나라 군대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남당(937~976)은 10국 중 가장 강력하고 문화적으로 발달했던 나라로, 당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했습니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
오(양오)는 5대 10국 시대 장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을 지배하며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던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