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936~947년)은 5대 10국 시대의 세 번째 왕조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재앙적인 외교적 결정을 내린 국가로 영원히 악명을 남겼습니다. 후진은 후당의 유력한 사타족 출신 절도사였던 석경당의 반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란 중 후당군의 반격에 밀려 궁지에 몰린 석경당은 북방의 강력한 유목 제국인 거란(요나라)의 황제 야율덕광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매우 극단적인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거란의 막강한 기병대를 빌려 후당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대가로, 석경당은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거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며 스스로를 '아들 황제(아황제)'로 낮추는 엄청난 굴욕을 감수했습니다.
또한 매년 막대한 양의 비단과 금은보화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대가는 바로 만리장성 이남의 핵심 전략 요충지인 '연운 16주(현재의 베이징과 허베이, 산시성 북부 일대)'를 거란에 영구히 할양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중원은 천혜의 방어선인 험준한 산맥과 성벽을 모두 잃었고, 북방 유목민의 기병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언제든 화북 평야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향후 400년 동안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안보적 재앙을 낳았습니다. 석경당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거란에 굽실거리며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조카인 석중귀(출제)가 황위에 오르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거란에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던 석중귀는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거란 황제에게 '신하'가 아닌 '손자'로서만 대우하겠다고 선언하며 무모하게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거란 황제는 대규모 징벌군을 이끌고 쳐내려왔고, 연운 16주라는 방어막이 없었던 후진은 거란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947년, 거란군이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포로로 끌고 가면서 후진은 건국 11년 만에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중원은 또다시 끔찍한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