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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수도: 개봉

역사

후한(947~951년)은 5대 10국 시대 -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세워진 960년까지 중국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싸우던 혼란기입니다. 북쪽 중원 지역에서는 5개의 왕조(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빠르게 교체되었고, 남쪽과 서쪽 지방에서는 10개 이상의 왕국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는 무력에 의한 정권 찬탈이 빈번했으나, 한편으로는 강남 지방의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하고 훗날 송나라의 문치주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중원을 차지했던 5개의 왕조 중 가장 짧은 단 4년의 수명을 기록한 비운의 왕조입니다. 하지만 그 짦은 존속 기간 안에는 외세의 침략과 군벌의 야망, 그리고 궁중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등 이 시대의 모든 혼란이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후한의 창건자인 유지원(고조)은 사타족 출신의 노련한 절도사로, 본래 이전 왕조인 후진 - 후진(936~947년)은 5대 10국 시대의 세 번째 왕조로,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이고 재앙적인 외교적 결정을 내린 국가로 영원히 악명을 남겼습니다. 후진은 후당의 유력한 사타족 출신 절도사였던 석경당의 반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반란 중 후당군의 반격에 밀려 궁지에 몰린 석경당은 북방의 강력한 유목 제국인 거란(요나라)의 황제 야율덕광에게 구원을 요청하며 매우 극단적인 거래를 제안했습니다. 거란의 막강한 기병대를 빌려 후당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대가로, 석경당은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거란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며 스스로를 '아들 황제(아황제)'로 낮추는 엄청난 굴욕을 감수했습니다. 또한 매년 막대한 양의 비단과 금은보화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대가는 바로 만리장성 이남의 핵심 전략 요충지인 '연운 16주(현재의 베이징과 허베이, 산시성 북부 일대)'를 거란에 영구히 할양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중원은 천혜의 방어선인 험준한 산맥과 성벽을 모두 잃었고, 북방 유목민의 기병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언제든 화북 평야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향후 400년 동안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안보적 재앙을 낳았습니다. 석경당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거란에 굽실거리며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조카인 석중귀(출제)가 황위에 오르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거란에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던 석중귀는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고 거란 황제에게 '신하'가 아닌 '손자'로서만 대우하겠다고 선언하며 무모하게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거란 황제는 대규모 징벌군을 이끌고 쳐내려왔고, 연운 16주라는 방어막이 없었던 후진은 거란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947년, 거란군이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포로로 끌고 가면서 후진은 건국 11년 만에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중원은 또다시 끔찍한 혼란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을 섬기던 강력한 군벌이었습니다. 후진의 황제가 '아들 황제'라는 굴욕적인 지위에서 벗어나고자 거란(요나라)에 반기를 들자, 분노한 거란의 황제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947년, 중원을 차지한 거란군은 한족들의 맹렬한 저항과 더위에 시달렸고, 보급마저 끊기자 결국 중원 지배를 포기하고 황급히 북쪽 초원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율덕광마저 병사하면서 중원에는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발생했습니다.

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태원(진양)에서 군사력을 온존하고 있던 유지원이었습니다. 그는 신속하게 군대를 이끌고 텅 빈 개봉으로 진격하여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후한을 건국했습니다.

그는 전란에 휩싸인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개국공신들과 여러 절도사들을 다독이며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 했으나, 불행히도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인 948년에 병으로 급사하고 맙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갓 태어난 제국에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제위는 유지원의 10대 아들인 유승우(은제)에게 돌아갔으나, 어리고 경험이 없던 새 황제는 아버지가 남겨둔 강력하고 노련한 개국공신들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측근들의 이간질에 흔들린 은제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기둥이었던 충신들을 하나둘씩 숙청하는 끔찍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이 맹목적인 의심과 공포가 결국 후한의 명줄을 끊고 말았습니다. 은제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자 가장 충성스러웠던 장군 곽위마저 제거하려 했고, 수도 개봉에 남아있던 곽위의 일가친척들을 몰살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루아침에 처자식을 모두 잃고 분노에 휩싸인 곽위는 즉각 군대를 돌려 수도 개봉으로 진격했습니다. 951년, 곽위의 정예군은 손쉽게 수도를 장악했고, 도망치던 은제가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후한은 건국 4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후한은 중원을 지배했던 마지막 사타족 왕조였으며,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자멸은 곽위가 한족 왕조인 후주 - 후주(951~960년)는 5대 10국 시대 북방 중원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5개의 왕조 중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고 찬란했던 국가입니다. 앞선 왕조들이 주로 돌궐계 사타족 출신의 군벌들에 의해 세워졌던 것과 달리, 후주는 한족 출신의 명장 곽위(태조)가 단명한 후한을 무너뜨리고 건국했습니다. 곽위는 즉위 후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며, 무너진 국가 행정 시스템을 재건하는 등 북방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후주를 진정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은 그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종 시영이었습니다. 시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비전 있는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0년은 천하를 개척하고, 10년은 백성을 기르며, 10년은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는 원대한 30년 천하 통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영은 가장 먼저 국방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쳤습니다. 지방 군벌들의 사병처럼 전락했던 군대를 국가에 충성하는 정예병으로 재편하고 중앙집권적인 군사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수리 사업을 크게 장려했으며, 국가에 부족한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대규모로 불교 사찰들을 폐쇄하고 불상의 구리를 녹여 동전을 만드는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내실을 바탕으로 후주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954년 고평 전투에서는 아군이 밀리는 와중에도 황제인 시영이 직접 화살이 빗발치는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맹을 발휘하며 북한과 거란(요나라) 연합군을 대파했습니다. 이후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부유한 남당과 후촉의 영토를 크게 빼앗아 엄청난 경제적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마침내 시영이 가장 숙원 하던 거란 정벌에 나서 연운 16주 중 일부를 수복하던 중, 959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병사하고 맙니다. 7살의 어린 아들이 황위를 잇자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불과 1년 뒤인 960년, 시영이 가장 신임하던 근위군 대장 조광윤이 진교병변을 통해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비록 후주는 10년도 채 존속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곽위와 시영이 피땀 흘려 다져놓은 강력한 군사력과 풍요로운 경제력은 고스란히 조광윤에게 넘어가 송나라가 70년의 분열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는 완벽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를 세우고 훗날 천하 통일의 기틀을 닦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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