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951~960년)는 5대 10국 시대 북방 중원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5개의 왕조 중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고 찬란했던 국가입니다. 앞선 왕조들이 주로 돌궐계 사타족 출신의 군벌들에 의해 세워졌던 것과 달리, 후주는 한족 출신의 명장 곽위(태조)가 단명한 후한을 무너뜨리고 건국했습니다.
곽위는 즉위 후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며, 무너진 국가 행정 시스템을 재건하는 등 북방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하지만 후주를 진정한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은 그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인 세종 시영이었습니다.
시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비전 있는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0년은 천하를 개척하고, 10년은 백성을 기르며, 10년은 태평성대를 이룩하겠다'는 원대한 30년 천하 통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시영은 가장 먼저 국방력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쳤습니다.
지방 군벌들의 사병처럼 전락했던 군대를 국가에 충성하는 정예병으로 재편하고 중앙집권적인 군사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수리 사업을 크게 장려했으며, 국가에 부족한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대규모로 불교 사찰들을 폐쇄하고 불상의 구리를 녹여 동전을 만드는 강력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내실을 바탕으로 후주의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954년 고평 전투에서는 아군이 밀리는 와중에도 황제인 시영이 직접 화살이 빗발치는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맹을 발휘하며 북한과 거란(요나라) 연합군을 대파했습니다.
이후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부유한 남당과 후촉의 영토를 크게 빼앗아 엄청난 경제적 부를 손에 넣었습니다. 마침내 시영이 가장 숙원 하던 거란 정벌에 나서 연운 16주 중 일부를 수복하던 중, 959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병사하고 맙니다.
7살의 어린 아들이 황위를 잇자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불과 1년 뒤인 960년, 시영이 가장 신임하던 근위군 대장 조광윤이 진교병변을 통해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비록 후주는 10년도 채 존속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곽위와 시영이 피땀 흘려 다져놓은 강력한 군사력과 풍요로운 경제력은 고스란히 조광윤에게 넘어가 송나라가 70년의 분열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는 완벽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