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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년 – 763년

안사의 난

당나라 -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절도사 - 당나라 후기에 국경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고위 군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해당 지역의 군사력은 물론 행정권과 조세권까지 장악한 막강한 권력자들을 말합니다. 안록산과 같은 변방 절도사들이 가진 지나치게 큰 힘은 결국 안사의 난을 초래했고, 당나라가 지방 할거 세력에 의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안록산 - 당나라의 세력을 모두 한 손에 쥐었던 장군으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화로웠던 제국을 피의 전쟁터로 만든 인물입니다.사사명 -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안록산이 죽은 뒤에도 반란군을 이끌며 당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장군입니다.이 일으킨 거대한 내란으로, 화려했던 당나라의 전성기를 끝내고 제국을 극심한 혼란과 가난에 빠뜨린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위치당나라 -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 전역 (중국)
교전국당나라 -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 대연 - 안록산의 난 당시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세운 반란 국가입니다. 당나라의 정통성에 도전하며 북방의 넓은 영토를 장악했으나, 내부 분열과 당군의 반격으로 763년에 멸망했습니다. (반란군)

배경 및 맥락

8세기 중반

개원의 치와 번영 뒤의 그림자

당나라 -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였던 '개원의 치 - 당 현종의 통치 전반기(713~741년)를 일컫는 말로, 당나라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던 황금시대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 당나라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렸으나, 말기에는 정치적 안일함이 '안사의 난'으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가 끝나갈 무렵, 명군이었던 현종은 점차 나랏일을 멀리하고 양귀비 -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당 현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나 안록산의 난 도중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와의 향락에 빠졌습니다. 이 틈을 타 권력을 잡은 관료들의 부패로 제국의 기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740년대 무렵

절도사 세력의 팽창

국가 병역 체계인 부병제 - 부병제는 서위에서 시작되어 북주 시대에 완성된 군사 제도입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나면 직접 무기를 챙겨 전장에 나가는 '병농일치'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부병으로 선발된 가문은 세금을 면제받는 대신 군 복무를 수행했으며, 이 강력한 군사 조직은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제국 팽창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가 무너지자, 국경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절도사 - 당나라 후기에 국경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고위 군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해당 지역의 군사력은 물론 행정권과 조세권까지 장악한 막강한 권력자들을 말합니다. 안록산과 같은 변방 절도사들이 가진 지나치게 큰 힘은 결국 안사의 난을 초래했고, 당나라가 지방 할거 세력에 의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세금과 행정권까지 손에 쥐며 중앙 정부가 통제하기 힘든 거대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750년 ~ 755년

안록산과 양국충의 갈등

재상 양국충 - 당나라 말기의 재상이자 양귀비의 6촌 오빠입니다.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안록산에게 심한 질투와 위기감을 느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사건건 반역자로 몰아세우며 압박했습니다. 이러한 양국충의 정치적 공세는 결국 안록산이 '간신 처단'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당 현종 - 당나라 제국을 가장 화려한 전성기(개원의 치)로 인도했으나, 말년에 정치보다 풍류를 즐기다 안록산의 난을 겪게 된 황제입니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될 정도로 총애를 받던 안록산 - 당나라의 세력을 모두 한 손에 쥐었던 장군으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화로웠던 제국을 피의 전쟁터로 만든 인물입니다.을 시기했습니다. 특히 안록산이 북방의 막강한 군사력을 한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에 큰 위기감을 느낀 양국충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안록산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반역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전개 과정

8세기 중반, 당나라 -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는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으나 현종이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북방의 실력자 안록산 - 당나라의 세력을 모두 한 손에 쥐었던 장군으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화로웠던 제국을 피의 전쟁터로 만든 인물입니다.은 16살이나 어린 양귀비 -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당 현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나 안록산의 난 도중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의 환심을 사 양아들을 자처하며 이례적인 총애를 받았습니다. 양귀비 -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당 현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안사의 난 도중 피난길 마위역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는 화려했던 당나라 전성기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됩니다.가 거구의 안록산을 아기처럼 목욕시키는 '세아' 의식을 행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밀접했으며, 이를 통해 안록산은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하며 막강한 권력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안록산의 성장은 재상 양국충 - 당나라 말기의 재상이자 양귀비의 6촌 오빠입니다.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안록산에게 심한 질투와 위기감을 느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사건건 반역자로 몰아세우며 압박했습니다. 이러한 양국충의 정치적 공세는 결국 안록산이 '간신 처단'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과의 치명적인 권력 다툼으로 번졌습니다. 결국 양국충이 안록산의 측근들을 체포하며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자, 정치적 위기에 몰린 안록산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755년 말, 안록산은 마침내 '간신 양국충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란의 칼날을 뽑아 들었습니다. 오랜 평화로 인해 당나라의 중앙군은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고, 모든 정예병은 국경의 절도사 - 당나라 후기에 국경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고위 군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해당 지역의 군사력은 물론 행정권과 조세권까지 장악한 막강한 권력자들을 말합니다. 안록산과 같은 변방 절도사들이 가진 지나치게 큰 힘은 결국 안사의 난을 초래했고, 당나라가 지방 할거 세력에 의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들이 장악하고 있는 '외중내경 - 당나라 중기의 위태로운 군사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한 표현입니다. '밖(국경)은 무겁고 안(중앙)은 가볍다'는 뜻으로, 정예병들은 모두 변방의 절도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반면 정작 수도 장안을 지킬 중앙군은 형편없이 약화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외중내경'의 구조 때문에 안록산의 정예 반란군이 남하했을 때 당나라 조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의 상태였습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안록산의 정예병들은 거침없이 남하하여 순식간에 낙양을 점령했고, 안록산은 스스로 '대연 - 안록산의 난 당시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세운 반란 국가입니다. 당나라의 정통성에 도전하며 북방의 넓은 영토를 장악했으나, 내부 분열과 당군의 반격으로 763년에 멸망했습니다.'의 황제라 칭했습니다.

반란군이 장안을 향해 진격하자, 당 현종 - 당나라 제국을 가장 화려한 전성기(개원의 치)로 인도했으나, 말년에 정치보다 풍류를 즐기다 안록산의 난을 겪게 된 황제입니다.은 험준한 산세로 둘러싸인 촉(사천) 땅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피난 도중 마위역 - 수도 장안 서쪽에 위치한 역참이자 언덕으로, 안사의 난 당시 피난 가던 당 현종의 군대가 반기를 들어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한 '마위역의 변'이 일어난 장소입니다.에서 황실 친위대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망친 양국충을 처단하고 현종이 총애하던 양귀비의 죽음을 강요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당나라 지휘부는 중대한 갈림길에 섰습니다. 현종은 계속해서 안전한 사천으로 가려 했지만, 태자 이형은 주변의 권유와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도망치는 대신 끝까지 남아 제국을 되찾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현종은 사천으로 향했고, 태자는 북서쪽의 국경 요새인 영무 -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었을 때, 태자 이형(당 숙종)이 황제로 즉위했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위기에 빠진 당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반격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오늘날 중국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해 있습니다.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곳에서 태자는 스스로 당 숙종 - 안록산의 난으로 나라가 위태롭던 시기, 영무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당나라의 반격을 이끈 군주입니다.으로 즉위하여 반격의 새로운 중심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수도를 잃고 행정 체계가 마비된 절망적인 상태였으나, 영무에 세워진 새로운 조정은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고 위구르족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란이 장기화되면서 반란군 지도부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록산은 심각한 비만과 당뇨로 인해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으며, 그 고통 때문에 성격이 극도로 포악해졌습니다. 그는 별다른 이유 없이 시종들과 장군들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주 매를 맞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장남 안경서 - 안록산의 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대연의 2대 황제가 되었으나 결국 사사명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입니다.는 아버지가 다른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결국 757년 초, 안경서는 평소 안록산에게 구박받던 내시 이정아와 공모하여 잠든 안록산을 살해했습니다. 거구였던 안록산은 배에 칼을 맞고 내장이 쏟아질 때까지 옆에 둔 칼조차 찾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안록산이 죽은 뒤 반란군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한때 당나라에 항복했던 사사명 -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안록산이 죽은 뒤에도 반란군을 이끌며 당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장군입니다.은 다시 반기를 들고 세력을 키워 안경서의 지위를 위협했습니다. 759년, 안경서가 업성에서 당나라 대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사사명 - 안록산과 함께 안사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 중 한 명입니다. 안록산 사후 반란군을 수습하여 대연의 황제가 되었으며, 당나라를 끝까지 위협했던 인물입니다.은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포위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승리 직후, 사사명은 안경서와 그의 형제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곳에서 사사명은 안경서가 아버지를 죽인 '천인공노할 패륜'을 저질렀다고 꾸짖으며 그들을 모두 처형했습니다. 사사명은 안록산의 죽음을 명분 삼아 스스로 대연의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이로써 전쟁은 더욱 잔혹하고 치열한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반란군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안경서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사사명 역시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그는 작은 실수라도 저지른 부하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여 군 내부의 공포감을 조성했습니다. 사사명 또한 큰아들 사조의 - 사사명의 큰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었으나 당나라군의 반격에 패배하여 자결한 안사의 난 마지막 지도자입니다. 대신 막내아들을 아꼈으며, 급기야 사조의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사조의가 761년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를 교살했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된 아들의 아버지 살해 사건은 반란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습니다. 결국 당나라는 위구르족의 지원과 곽자의 - 안사의 난 당시 무너져가던 당나라를 지탱한 최고의 영웅입니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인품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고 제국을 다시 세운 명장 중의 명장입니다., 이광필 - 곽자의와 함께 안사의 난을 잠재운 당나라 최고의 명장입니다. 특히 수적 열세 속에서도 기발한 작전으로 반란군을 무너뜨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같은 명장들의 활약에 힘입어 763년 분열된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당나라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고 지방 절도사들이 득세하는 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요 사건

752년 – 755년

양국충 - 당나라 말기의 재상이자 양귀비의 6촌 오빠입니다.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안록산에게 심한 질투와 위기감을 느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사건건 반역자로 몰아세우며 압박했습니다. 이러한 양국충의 정치적 공세는 결국 안록산이 '간신 처단'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안록산 - 당나라의 세력을 모두 한 손에 쥐었던 장군으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화로웠던 제국을 피의 전쟁터로 만든 인물입니다.의 갈등 고조

📍수도 장안 (지도 보기)

재상 양국충 - 당나라 말기의 재상이자 양귀비의 6촌 오빠입니다.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안록산에게 심한 질투와 위기감을 느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사건건 반역자로 몰아세우며 압박했습니다. 이러한 양국충의 정치적 공세는 결국 안록산이 '간신 처단'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과 변방의 실력자 안록산 - 당나라의 세력을 모두 한 손에 쥐었던 장군으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화로웠던 제국을 피의 전쟁터로 만든 인물입니다. 사이의 권력 다툼이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록산의 모반 가능성을 경고하며 압박했고, 안록산은 양귀비 -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당 현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나 안록산의 난 도중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의 수양아들을 자처하며 황제의 신임을 유지하는 동시에 뒤로는 반란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755년

안록산의 반란 시작

📍범양 (베이징 인근) (지도 보기)

안록산이 간신 양국충을 몰아내겠다는 구실로 15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범양에서 반란의 깃발을 올리며 전쟁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755년 – 756년

낙양 함락

📍부도 낙양 (지도 보기)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당나라 -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라 불리며, 전 세계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모여들었던 화려한 제국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만든 '노자'의 후손이라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이 시기에는 이백, 두보와 같은 시인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고, 서유기 속 손오공과 삼장법사의 모험도 바로 이때의 실제 승려 현장의 기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 장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하고 앞선 문명을 가진 도시로,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번성했습니다.의 부도인 낙양을 함락시켰고, 안록산은 이곳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라 대연 - 안록산의 난 당시 안록산이 낙양을 함락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세운 반란 국가입니다. 당나라의 정통성에 도전하며 북방의 넓은 영토를 장악했으나, 내부 분열과 당군의 반격으로 763년에 멸망했습니다.국을 세웠습니다.

756년

장안 함락과 촉(사천)으로의 피난

📍수도 장안과 마위역 (지도 보기)

반란군이 장안을 점령하자 현종은 험준한 사천(촉)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도중 마위역 - 수도 장안 서쪽에 위치한 역참이자 언덕으로, 안사의 난 당시 피난 가던 당 현종의 군대가 반기를 들어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한 '마위역의 변'이 일어난 장소입니다.에서 분노한 병사들이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의 처형을 강요하면서,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756년

숙종의 영무 -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었을 때, 태자 이형(당 숙종)이 황제로 즉위했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위기에 빠진 당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반격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오늘날 중국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해 있습니다. 즉위와 당의 결집

반란군이 세운 '대연'이 두 수도를 점령하면서 당나라는 행정 체계가 마비되고 멸망 직전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습니다. 영무 - 안록산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었을 때, 태자 이형(당 숙종)이 황제로 즉위했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위기에 빠진 당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반격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오늘날 중국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위치해 있습니다.에서 즉위한 숙종은 흩어진 병력을 모으고 위구르족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제국의 명맥을 잇기 위한 처절한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757년

수양성 전투

📍수양 (상추) (지도 보기)

장순과 허원의 결사대가 적은 병력으로 반란군의 대군을 수개월간 막아내며, 당나라의 곡창지대인 강남 지역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757년

안록산의 죽음

질병과 실명으로 인해 극도로 포악해진 안록산이 신하들을 무참히 매질하고 장남 안경서 - 안록산의 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대연의 2대 황제가 되었으나 결국 사사명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입니다. 대신 다른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안경서가 내시와 공모하여 잠든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757년

양경(장안·낙양) 탈환

📍장안과 낙양 (지도 보기)

명장 곽자의 - 안사의 난 당시 무너져가던 당나라를 지탱한 최고의 영웅입니다. 그는 뛰어난 지략과 인품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고 제국을 다시 세운 명장 중의 명장입니다.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위구르족 기병의 도움을 받아 두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되찾으며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759년

사사명 -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안록산이 죽은 뒤에도 반란군을 이끌며 당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장군입니다.의 안경서 처형

업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나라 군을 격퇴한 사사명 -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핵심 인물로, 안록산이 죽은 뒤에도 반란군을 이끌며 당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장군입니다.은 아버지를 죽인 패륜의 죄를 물어 안경서와 그 형제들을 처형하고 스스로 대연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761년

사사명의 죽음

📍낙양 인근 (지도 보기)

반란군의 새로운 수장이 된 사사명 역시 장남 사조의 - 사사명의 큰아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었으나 당나라군의 반격에 패배하여 자결한 안사의 난 마지막 지도자입니다.를 죽이고 막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다 사조의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안록산에 이어 사사명까지 이어진 아들의 아버지 살해는 반란군 내부의 불신과 분열을 극대화했습니다.

763년

반란의 종결

📍당나라 전역 (지도 보기)

마지막 반란군 지도자 사조의가 패배 후 자결하면서,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8년간의 비극적인 내란이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예술 및 유산

명황행촉도

명황행촉도

당나라 화풍, 후대의 모사본, 8~10세기

🏛️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푸르고 초록빛인 산속 절벽 길을 붉은 옷을 입은 작은 일행이 구불구불 지나간다. 반란군이 밀고 들어오자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현종과 궁중 사람들이다. 화가는 산을 크게, 황제를 작게 그렸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 피란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잘 보여준다.

두보의 춘망(春望)

두보, 757년

🏛️ 두보초당, 청두, 중국

시인은 반란군에게 함락된 수도 장안에 갇힌 채 이 시를 썼다. 다섯 글자씩 여덟 줄로 짓는 오언율시이며, 무너진 나라와 아무 일 없다는 듯 찾아온 봄을 나란히 놓아 슬픔을 드러낸다. 그는 이 시기에 굶주림으로 자식을 잃었다. 그의 시는 반란을 궁중의 사건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겪은 일로 남겼다.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나라는 부서졌어도 산과 강은 그대로이고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성에 봄이 왔지만 풀과 나무만 우거졌네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시절이 서러워 꽃을 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헤어짐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마음이 놀라네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봉화(위급한 일을 알리려 피우는 불)는 석 달째 이어지고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편지 한 장이 만금처럼 귀하네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흰머리는 긁을수록 더 짧아져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이제는 비녀(머리를 틀어 올려 꽂는 장신구)조차 꽂지 못하겠네

장한가와 양귀비

백거이, 후대의 화가들, 시는 806년, 그림은 후대

🏛️ 중국과 일본의 여러 소장처에 삽화본

반란이 있고 50년 뒤, 한 시인이 황제와 그가 아끼던 후궁의 이야기를 120구가 넘는 긴 시로 다시 썼다. 그 후궁은 피란길에서 황제의 호위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시의 끝부분에서는 도사가 신선의 섬에서 그의 넋을 찾아낸다.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크게 사랑받아 이제는 전설이 역사를 덮을 정도가 되었다. 아래는 가장 많이 읊어지는 네 대목이다. 回眸一笑百媚生 六宮粉黛無顏色 (회모일소백미생 육궁분대무안색) 눈길을 돌려 한 번 웃으면 온갖 아름다움이 피어나, 후궁의 단장한 여인들이 모두 낯빛을 잃었다 六軍不發無奈何 宛轉蛾眉馬前死 (육군불발무내하 완전아미마전사) 군사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찌할 수 없어, 고운 눈썹의 그가 말 앞에서 죽었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為連理枝 (재천원작비익조 재지원위연리지) 하늘에서는 비익조(암수가 눈과 날개를 하나씩 가져 둘이 붙어야 나는 새)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로 붙어 자란 것)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絕期 (천장지구유시진 차한면면무절기) 하늘과 땅은 오래여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끊길 날이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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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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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로, 스스로 '대연'의 첫 번째 황제라고 칭했던 인물은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