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1월, 독실한 신앙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재건했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참회왕 -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하고 독실한 신앙생활로 성인으로 시성된 잉글랜드 국왕입니다. 후계자 없이 서거하면서 1066년 잉글랜드 왕위를 둘러싼 노르만 정복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습니다.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잉글랜드 귀족 회의는 가장 유력한 웨식스 백작 해럴드 고드윈슨 - 1066년 잉글랜드를 침공한 바이킹 대군을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격파했으나, 곧바로 남하하여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앵글로색슨의 마지막 군주입니다.을 해럴드 2세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영국해협 건너편 센강 - 프랑스 북부를 가로질러 수도 파리를 관통한 뒤 영국해협으로 흘러드는 총길이 약 777km의 유서 깊은 강입니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파리 중심부의 시테섬을 감싸며 흐르며 고대부터 프랑스의 심장부를 키워낸 가장 중요한 생명줄이자 수상 교통로였습니다. 센강이라는 이름은 고대 켈트족(갈리아인)이 섬기던 물과 치유의 여신 '세콰나(Sequana)'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세콰나는 오리 모양의 배를 타고 강을 떠다니며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강이 시작되는 수원지에는 세콰나를 모신 고대 신전 터가 남아 있으며, 병이 낫기를 빌며 바쳤던 수많은 나무 조각상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중세에는 바이킹(노르만족)이 긴 배를 타고 센강을 거슬러 올라와 파리를 포위 공격했고, 이후 강 하류 일대는 노르만족의 영지가 되어 노르망디 공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센강은 수많은 전쟁의 승패가 갈린 군사적 요충지이자, 수천 년 동안 프랑스의 문화와 역사를 꽃피운 무대입니다. 하류 노르망디 - 프랑스 서북부 영국해협에 면한 비옥하고 푸른 해안 지방입니다. 완만한 구릉과 풍요로운 목초지, 웅장한 백색 백악 절벽이 펼쳐진 곳으로 센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입니다.911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가 침입해 오던 바이킹(노르만인) 수장 롤로에게 센강 하류 땅을 내어주며 '노르망디 공국'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방 바이킹 전사의 거친 기질과 대륙 프랑스의 기독교 신앙, 기병 전술이 융합되면서 유럽 최정예의 기사 집단인 '노르만족'이 탄생했습니다.1066년 이곳의 군주였던 윌리엄 공작이 영국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영국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진 역사적인 무대이기도 합니다.의 공작 윌리엄은 과거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차기 왕위를 약속했고 과거 프랑스에 표류했던 해럴드 역시 성스러운 종교 유물 앞에서 이를 지키겠다고 맹세했다며 격분했습니다. 한편 북유럽의 패왕인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하드라다 - 비잔티움 제국의 바랑기안 근위대장으로 지중해를 누비며 전설적인 무공을 쌓은 뒤 노르웨이 국왕이 된 인물입니다. 1066년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고 대침공을 감행했으나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전사하며 바이킹 시대의 막을 내렸습니다. 역시 옛 왕실 조약을 근거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여기에 해럴드 2세에게 쫓겨난 친동생 토스티그 - 웨식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이자 해럴드 2세의 동생으로, 노섬브리아 백작이었으나 반란으로 추방당한 뒤 노르웨이의 하랄드 하드라다와 손잡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한 비운의 귀족입니다.가 복수심을 품고 윌리엄을 거쳐 하랄드 하드라다를 찾아가 북부 귀족들의 지지를 약속하며 침공을 적극 부추겼습니다. 하랄드와 윌리엄은 협력한 동맹이 아니라 각자 잉글랜드 왕관을 독차지하려던 철저한 경쟁자였으나, 결과적으로 해럴드 2세는 바다 건너 두 강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미증유의 3파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윌리엄은 이미 8월에 7천 명의 군사와 함대를 소집해 출항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여름 내내 영국해협에 불어닥친 거센 북풍 때문에 배를 띄우지 못하고 프랑스 해안에 한 달 넘게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남부 해안에서 윌리엄을 기다리던 해럴드 2세가 군량이 바닥나 군대를 해산하려던 찰나, 북풍을 타고 북해를 건너온 하랄드 하드라다와 토스티그의 300척 바이킹 함선이 잉글랜드 북부를 기습했습니다. 하랄드가 풀퍼드 전투에서 잉글랜드 북부 군대를 대파하고 요크를 장악하자, 해럴드 2세는 전 군을 이끌고 런던 -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 템스강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수도이자 세계적인 대도시입니다. 로마 제국 시대인 서기 1세기경 '론디니움'이라는 군사 요새와 상업 항구로 처음 건설된 이후, 브리튼 섬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중세 시대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왕궁이 들어서며 국왕의 대관식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도시를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석조 요새인 런던탑(화이트 타워)이 오늘날까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대화재와 흑사병 같은 수많은 재난을 딛고 발전하여 근대 대영제국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전통적인 고딕 양식 건축물과 현대적인 금융 빌딩들이 공존하는 역사 도시입니다.에서 요크까지 300km를 나흘 만에 주파하는 경이적인 강행군을 펼쳤습니다.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방심하고 있던 바이킹군을 기습한 해럴드는 더웬트강 - 잉글랜드 북부 요크셔를 가로질러 흐르는 약 115km 길이의 강으로, 우즈강(River Ouse)으로 흘러듭니다. 고대 켈트어로 '참나무가 많은 맑은 물'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요크 동쪽 평야 지대의 비옥한 농경지와 수운을 지탱해 온 역사적인 젖줄입니다. 1066년 9월 25일, 이 강을 가로지르는 좁은 목조 다리에서 역사적인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명의 거대한 바이킹 전사가 다리 위를 홀로 막아서서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잉글랜드 대군 수십 명을 쓰러뜨렸고, 한 잉글랜드 병사가 나무통을 타고 다리 밑으로 숨어들어 판자 틈으로 창을 찔러 넣고 나서야 비로소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해럴드 2세는 더웬트강변에서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하드라다와 동생 토스티그를 사살하며 바이킹 침략사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비록 승리했지만 이곳에서 벌어진 처절한 백병전으로 잉글랜드군 역시 막대한 피로와 손실을 입어, 3주 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을 피로 물들이는 처절한 백병전 끝에 하랄드 하드라다와 동생 토스티그를 사살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전사였던 국왕 하드라다의 전사와 함께, 침공해 온 300척의 함선 중 살아남아 본국으로 돌아간 배가 고작 24척에 불과할 정도로 노르웨이 정예 전사 계층 전체가 궤멸당했습니다. 이 치명적인 파멸과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화가 맞물리면서, 250년 동안 영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북유럽 바이킹의 대규모 침략 시대는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해럴드에게는 대승의 기쁨을 누릴 틈조차 없었습니다.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승리한 바로 그 주말, 한 달 넘게 윌리엄의 발을 묶고 있던 영국해협의 바람이 기적처럼 잉글랜드 쪽으로 부는 남풍으로 바뀌었습니다. 윌리엄은 텅 빈 남부 페븐시 해안에 무혈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북부 전투로 정예 전사들을 잃고 지칠 대로 지친 해럴드는 군대를 수습해 다시 남쪽으로 400km를 달려내려갔습니다. 10월 14일 센락 언덕에서 맞붙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앵글로색슨 보병들은 굳건한 방패벽 - 중세 전사들이 방패의 가장자리를 서로 겹치게 맞대어 마치 성벽처럼 굳건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밀집 보병 진형입니다. 고대 바이킹 언어로는 '스캴드보르그(Skjaldborg)'라고 불렸으며, 북유럽 바이킹과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전사들이 가장 애용한 핵심 전술이었습니다.앞줄의 전사들이 둥근 방패나 물방울 모양의 방패를 틈새 없이 맞물려 적의 화살과 투창을 막아내고, 그 뒤에서 장창과 양손 도끼를 휘두르며 적을 요격했습니다. 병사들이 대열을 지키고 있는 한, 중세 기병의 정면 돌격조차 튕겨낼 만큼 방어력이 뛰어났습니다.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왕의 앵글로색슨 보병들은 센락 언덕 위에 이 방패벽을 치고 노르만 기사단의 돌격을 반나절 동안 완벽하게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노르만군의 거짓 후퇴에 속아 일부 병사들이 흥분하여 대열을 깨고 언덕 아래로 뛰어나오면서 틈이 생겼고, 결국 방패벽이 무너지며 패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을 치고 버텼습니다. 노르만 기사들은 등자 - 말을 탈 때 기수가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안장 양옆으로 늘어뜨린 발받침 고리입니다. 고대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유목민들에 의해 발명되어 6~8세기경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며, 인류 군사 기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등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기수가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오직 허벅지와 무릎 힘으로만 버텨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창을 강하게 찌르거나 칼을 크게 휘두르면 반동으로 말에서 떨어질 위험이 컸습니다. 그러나 등자가 도입되면서 기수는 말 위에서 일어서거나 몸을 단단히 고정할 수 있게 되었고, 몸의 중심을 완벽히 유지하며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특히 고정형 안장과 결합되면서 기병은 말의 달리는 무게와 속도를 창끝에 그대로 실어 적진을 들이받는 강력한 돌격 전술(쇼크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등자의 보급은 기병을 전장의 절대적인 주역으로 끌어올렸으며, 유럽에서 중세 기사 계급의 형성과 봉건 제도의 정착을 이끈 결정적인 군사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와 고정형 안장 - 단단한 나무 뼈대(안장틀)를 바탕으로 앞쪽의 앞가리개(포멜)와 뒤쪽의 뒷가리개(캔틀)를 높게 솟아오르게 제작하여 기수를 말 위에 확고히 고정해주는 중세 군용 안장입니다. 로마 제국의 뿔 안장에서 발전하여 중세 유럽 기사들의 핵심 전투 장비로 정착했습니다.고대의 단순한 가죽 패드 안장과 달리, 딱딱한 나무 뼈대가 기수의 체중을 말의 등뼈가 아닌 양옆 갈비뼈로 고르게 분산시켜 말이 척추를 다치지 않고 무거운 중무장 기사를 장시간 태울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높은 뒷가리개는 창으로 적을 들이받았을 때 발생하는 거대한 충격과 반동을 흡수하여 기수가 뒤로 튕겨 나가는 것을 완벽하게 막아주었습니다.등자(발걸이)와 결합된 고정형 안장은 기수와 말을 하나의 거대한 충격 무기로 일체화시켰습니다. 노르만 기사들은 이 안장에 깊숙이 앉아 긴 창을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우고 돌격하는 '쿠치드 랜스' 전술을 완성했고,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등 수많은 중세 전장에서 보병들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습니다.을 활용해 강력한 돌격 충격력을 가했으나 방패벽은 쉽게 뚫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윌리엄은 도망치는 척하는 거짓 후퇴 전술을 써서 흥분한 잉글랜드 수비대를 언덕 아래로 유인해 방패벽 대열을 무너뜨렸습니다. 혼란 속에서 해럴드 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면서 노르만군이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헤이스팅스 승리 이후 런던으로 진격한 윌리엄은 1066년 성탄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 - 영국해협을 건너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 왕조의 개창자입니다. 강력한 봉건 제도를 확립하고 런던탑과 둠즈데이 북을 남겨 현대 영국의 기틀을 다졌습니다.로 즉위하며 노르만 왕조를 열었습니다. 대관식 도중 터져 나온 백성들의 환호성을 반란으로 오인한 노르만 경비병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는 소동 속에서 왕관을 쓴 그는, 이후 1069년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요크셔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어 10만 명 이상을 굶주려 죽게 한 가혹한 '북부의 초토화'로 저항 의지를 완전히 꺾었습니다. 윌리엄은 저항한 앵글로색슨 영주들의 땅을 몰수하여 5천여 명의 노르만 기사들에게 나누어 주며, 모든 영주와 가신은 직속 주군보다 국왕에게 먼저 충성해야 한다는 '살즈버리 선서 - 1086년 8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가 전국의 모든 토지 소유자와 봉건 영주, 기사들을 살즈버리(올드 새럼)로 소집하여 국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도록 맹세하게 한 역사적인 사건이자 봉건 원칙입니다.당시 서유럽의 전통적인 봉건 제도는 '내 신하의 신하는 나의 신하가 아니다'라는 원칙을 따랐습니다. 즉 하급 가신은 자신에게 직접 영지를 준 직속 주군에게만 복종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큰 영주가 반란을 일으키면 그 아래 기사들도 주군을 따라 국왕에 대항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윌리엄 1세는 이러한 봉건적 분열을 막기 위해, 어떤 영주 아래에 있는 하급 가신이라 하더라도 국왕에 대한 충성이 직속 주군에 대한 의무보다 항상 앞서야 한다는 파격적인 원칙을 강제했습니다.살즈버리 선서는 같은 해 편찬된 전국 재산 대장인 '둠즈데이 북'과 함께 잉글랜드 왕권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제로 성장시킨 핵심 토대가 되었습니다. 영주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는 분열을 차단했으며,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과 달리 일찍부터 통일된 법률과 왕권 중심의 국가 체제를 갖추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를 통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반란을 감시하기 위해 런던탑(화이트 타워) 등 수백 개의 석조 성채를 전국에 세웠고, 1086년에는 돼지 한 마리까지 전국의 재산을 샅샅이 기록한 '둠즈데이 북 - 1086년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명령으로 잉글랜드 전역의 토지와 가축, 인구, 재산을 샅샅이 조사하여 양피지에 기록한 중세 유럽 최초의 대규모 토지 대장입니다.'최후의 심판 날(Doomsday)'이 오면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국왕의 조사관들 앞에서는 그 누구도 소유한 땅과 소 한 마리까지 숨길 수 없다고 하여 백성들이 두려움을 담아 '둠즈데이 북'이라 불렀습니다. 조사관들은 각 마을을 돌며 참회왕 에드워드 시절의 소유주와 현재의 노르만인 소유주, 쟁기 수, 방앗간, 물고기 양식장까지 철저하게 적어 넣었습니다.이 책을 통해 윌리엄 1세는 세금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징수하고 반란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분권적이던 잉글랜드를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 국가로 재편하는 초석을 다졌습니다. 오늘날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는 중세 사회사 연구의 보물입니다.'을 편찬하여 체계적인 통치 기반을 다졌습니다. 궁정의 노르만 프랑스어와 민중의 고대 영어가 뒤섞이면서 독특한 언어 변화도 일어났습니다. 들판에서 가축을 직접 기르고 돌보던 피지배층 앵글로색슨 농민들은 게르만계 고대 영어로 소(Cow)와 돼지(Pig), 양(Sheep)을 불렀던 반면, 성의 식탁에 앉아 요리된 고기를 즐기던 노르만 귀족 지배층은 프랑스어로 쇠고기(Beef)와 돼지고기(Pork), 양고기(Mutton)를 불렀습니다. 이처럼 가축을 기르던 농민의 말과 식탁에서 요리를 맛보던 귀족의 말이 융합되면서 살아있는 동물과 식탁 위의 고기 이름이 나뉘는 독특한 어휘 체계가 생겨났고, 법률과 군사, 행정 분야에도 프랑스어 어휘가 대거 스며들며 오늘날의 풍부한 현대 영어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이중적인 지위가 탄생하여, 잉글랜드는 북유럽 바이킹의 영향권에서 영구히 벗어난 반면 훗날 프랑스와 대륙의 패권을 두고 부딪히는 '백년전쟁'의 거대한 불씨를 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