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88–85년)은 미트리다테스가 로마 -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년 – 기원전 27년)은 고대 로마 문명 중 공화제 정부 형태를 띠었던 시기입니다. 로마 왕정을 무너뜨리고 시작되어 약 450년 이상 지속되었으나, 일련의 내전 끝에 로마 제국으로 전환되었습니다.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자로 환영받으며 소아시아를 휩쓸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수십 년간 로마의 조세 청부업자 '푸블리카니 - 탐욕의 대리인들푸블리카니(Publicani)는 고대 로마에서 속주의 세금 징수권을 낙찰받은 민간 청부업자들입니다. 관료 조직이 부족했던 로마 정부는 세금 징수 권한을 경매에 부쳐 민간 회사에 팔았습니다. 푸블리카니는 국가에 세금을 미리 납부하고, 현지 주민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투자금을 회수하고 이익을 남겼습니다.착취의 시스템이들의 이익은 정해진 세금보다 얼마나 더 많이 쥐어짜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푸블리카니는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았습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재산을 압류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특히 아시아 속주(소아시아 서부)에서 그들의 약탈은 주민들을 깊은 빚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어넣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전쟁의 불씨푸블리카니에 대한 광범위한 증오심은 미트리다테스 6세가 구세주로 환영받은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기원전 88년 그가 로마인 학살(아시아의 만종)을 명령했을 때, 현지인들은 자신들을 괴롭혀온 세금 청부업자들과 그들을 비호하던 부패한 로마 총독들에게 쌓인 수십 년간의 분노를 터뜨리며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들은 부패한 총독들과 결탁해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빚을 갚지 못한 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겨 깊은 원한을 샀습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러한 분노를 이용하여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5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으로 그리스 도시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러한 대중 영합 전략은 '아시아의 만종 - 기원전 88년의 대학살아시아의 만종(Asiatic Vespers)은 기원전 88년,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지시로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전역에서 자행된 로마인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 사건을 말합니다.피의 신호탄미트리다테스는 각 도시의 총독들에게 비밀 서신을 보내 특정 날짜에 모든 로마인과 이탈리아 거주민을 살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 하루 만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약 8만 명에서 15만 명이 현지 그리스인들에 의해 학살당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로마에 대한 가장 확실한 선전포고였습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 도시들을 공범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이 로마와 타협할 수 없게 하고 자신과 운명을 같이하도록 강요했습니다.이름의 유래'아시아의 만종'이라는 이름은 후대 역사가들이 1282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프랑스 지배에 대한 반란인 '시칠리아의 만종'에 빗대어 붙인 것입니다. '만종(Vespers)'은 저녁 기도를 뜻하는데, 이는 특정 신호에 맞춰 동시에 봉기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는데, 하루 만에 8만 명의 로마인과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을 학살함으로써 도시들이 자신과 운명을 같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그리스로 눈을 돌려 장군들을 보내 아테네 - 아티카 지역의 해양 민주정 폴리스로, 강력한 해군과 아크로폴리스, 활발한 문화로 유명합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동맹국에게 조공을 받았고, 그리스 주도권을 두고 스파르타와 충돌했습니다.를 장악했습니다. 그곳에 철학자 출신의 독재자 아리스티온을 세워 공포 정치를 펼치게 했습니다. 또한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의 주요 거점이자 노예 시장이었던 신성한 섬 델로스를 공격하여 2만 명의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하지만 냉철하고 유능한 로마 장군 술라가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술라는 아테네와 피레우스 - 피레우스는 아테네 남서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항구 도시입니다. 고대부터 아테네의 해군 및 상업적 관문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테네와 안전하게 연결되는 유명한 '장벽(Long Walls)'으로 요새화되어 있었으며, 아테네 해군력의 중심지이자 지중해 전역에서 온 상인, 선원, 물자로 붐비는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를 포위하고 결국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이어진 카이로네이아와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술라의 정예 군단은 수적으로 우세한 폰투스 - 폰투스는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두 세계를 잇는 거대한 다리였습니다. 흑해의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아나톨리아 북부에서 탄생한 이 나라는 바닷길을 지배하며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왕가는 페르시아 제국의 위엄과 그리스의 자유로운 문화를 동시에 품었죠. 동양의 비단과 서양의 철학이 이곳에서 뒤섞이며, 폰투스는 그 자체로 찬란하게 빛나는 문명의 교차로가 되었습니다.군을 격파했습니다. 전쟁은 다르다노스 조약으로 끝났으며,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모든 정복지에서 물러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며 함대 일부를 양도해야 했지만, 자신의 왕국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83–81년)은 짧지만 중요한 막간극이었습니다. 술라가 아시아에 남겨둔 부관이었던 로마 장군 무레나가 개선식을 탐내어, 미트리다테스의 재무장을 구실로 폰투스를 기습 공격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미트리다테스는 정당방위 차원에서 반격하여 할리스 전투에서 무레나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평화를 원했던 술라의 명령으로 전쟁은 멈췄지만, 이 승리로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했습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73–63년)은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유산으로 남기며 사망하자, 이를 위협으로 느낀 미트리다테스가 비티니아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는 루쿨루스를 파견했고, 그는 키지쿠스 포위전에서 뛰어난 전술로 미트리다테스를 농락하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어진 카비라 전투에서도 패배한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왕국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는 사위인 아르메니아 - 험준한 아르메니아 고원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고대 근동의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철기 시대 우라르투 왕국의 유산 위에서 성장한 이 왕국은 티그라네스 대왕(재위 기원전 95–55년) 시절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티그라네스는 카스피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웅장한 새 수도 티그라노케르타를 건설했습니다.의 티그라네스 대왕에게 망명했는데, 루쿨루스의 신병 인도 요구를 티그라네스가 '장인어른을 배신한다면 세상이 비난할 것'이라며 거절하자 전쟁은 아르메니아로 확전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티그라노케르타 전투로 이어지게 됩니다.
루쿨루스의 눈부신 승리에도 불구하고, 길어진 전쟁과 가혹한 군율에 지친 로마 병사들은 종군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틈을 타 미트리다테스는 폰투스로 돌아와 왕국을 되찾았습니다. 기원전 66년, 로마는 사령관을 폼페이우스 - 로마의 저명한 장군이자 정치가로,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으며 내전 당시 카이사르의 주요 경쟁자였습니다.로 교체했습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를 완벽하게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크림반도까지 쫓겨난 노왕 미트리다테스는 아들 파르나케스의 배신에 절망하여 기원전 63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써 전쟁은 막을 내리고 동방에서 로마의 지배권이 확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