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명나라 - 1368년 태조 주원장이 몽골의 원나라를 축출하고 한족의 통일 제국을 재건한 동아시아의 대제국입니다.가 임진왜란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한 틈을 타, 만주의 건주여진 추장 누르하치 - 열세 자루의 갑옷으로 거병하여 흩어진 여진 부족을 통일하고 팔기제를 창설한 청나라의 실질적 시조.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며 급부상했다. 그는 사냥 조직을 정예 군사·행정 체제로 개편한 팔기제 - 팔기제는 17세기 초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사냥 조직인 니루를 바탕으로 창설한 군사 및 행정 제도입니다. 백성들을 황·백·홍·남 네 가지 색의 깃발과, 테두리를 두른 네 가지 깃발 등 총 8개의 부대(팔기)로 조직하여 평소에는 농사와 목축을 하고 전쟁이 나면 즉시 군대로 출병하도록 했습니다.팔기군은 강력한 규율과 뛰어난 기마 궁술을 자랑하는 최정예 부대로,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핵심 전력이 되었습니다. 이후 몽골 부족을 흡수한 몽골 팔기와 한족 항복 군인들로 구성된 한군 팔기가 추가되어 다민족 제국 청나라를 지탱하는 거대한 군사적 기둥으로 발전했습니다.를 창설하고 1616년 근거지인 허투알라 - 허투알라는 만주어로 '가로로 넓적한 언덕'이라는 뜻으로, 중국 랴오닝성(요령성) 신빈현에 자리 잡은 산성 도시입니다. 험준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 만주를 통일하고 청나라의 기틀을 닦은 누르하치와 건주여진의 발흥지이자 첫 번째 수도였습니다.1616년 누르하치는 이곳에서 부족장들의 추대를 받아 칸의 자리에 오르며 후금을 건국하고 팔기군을 창설했습니다. 1618년에는 허투알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명나라의 죄상을 규탄하는 '칠대한'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대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이후 청나라는 수도를 요양과 심양, 베이징으로 차례로 옮겼지만, 왕조가 태동한 이 성스러운 땅을 '나라를 일으킨 도읍'이라는 뜻의 '흥경(興京)'으로 부르며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극진히 보존하고 제사를 올렸습니다.(현재 요령성 신빈)에서 후금 - 만주족이 세워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아우른 거대한 최후의 제국을 건국했다. 1618년에는 허투알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명나라에 맞서 싸우겠다는 일곱 가지 큰 원한의 선언문(칠대한)을 발표하고 출병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이듬해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가 10만 대군을 네 갈래로 나누어 포위해 오자, 누르하치는 "너희가 몇 갈래로 오든 나는 오직 한 길로 간다"라며 자신의 전군을 쪼개지 않고 한곳으로 결집했다. 그리고 험준한 산악을 누비며 흩어져 오던 명나라 각 부대를 차례로 각개격파하는 기동 전술로 명군과 조선 -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여 5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과학 발전, 한글 창제를 이룩한 한반도의 왕조입니다. 원군을 궤멸시키고 요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사르후 전투의 참패 이후 후금군이 파죽지세로 요동을 집어삼키자, 공포에 질린 명나라 조정은 만주 땅을 모두 버리고 만리장성 - 중국의 역사적인 북방 국경을 따라 유라시아 초원의 다양한 유목 세력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조된 거대한 성곽 방어선입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진나라, 한나라, 그리고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해서 건설 및 보수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성벽에 얽힌 가장 유명한 민담으로 '맹강녀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진나라 시기 가혹한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장성을 쌓다 숨진 남편의 소식을 들은 아내 맹강녀가 슬픔에 겨워 장성 밑에서 며칠 밤낮을 울부짖자, 그녀의 눈물과 통곡에 하늘이 감복하여 장성 수백 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 아래 묻혀 있던 남편의 유골이 드러났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만리장성은 거대한 문명의 방벽이자, 그 성벽을 쌓아 올리기 위해 희생된 수많은 민초들의 눈물이 서려 있는 복합적인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의 동쪽 끝이자 수도 베이징의 관문인 산해관 - 산해관(山海關)은 중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시에 자리 잡은 만리장성 동쪽 끝의 핵심 요새 관문입니다. 북쪽으로는 험준하게 솟아오른 옌산(연산)산맥이 가로막고, 남쪽으로는 출렁이는 발해(보하이해) 바다가 펼쳐져 있어, 산과 바다 사이의 좁은 평지 회랑을 가로막는 천혜의 요충지로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불렸습니다.장성은 북쪽 산맥 능선에서 내려와 사각형의 거대한 산해관 본성과 옹성을 거친 뒤, 남쪽 해안가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닷속으로 파고드는 '노룡두(老龙头, 늙은 용의 머리)'까지 빈틈없이 이어집니다. 만주에서 수도 베이징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관문이었기에, 명나라는 이곳에 최정예 관녕기병과 대포를 집중 배치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1644년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최고 사령관(총병) 오삼계는 만리장성의 빗장을 열고 청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섭정왕 도르곤이 이끄는 팔기군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로써 청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산해관을 통과해 중원으로 물밀듯이 진격하며 대제국 수립의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안으로만 숨으려 했다. 이때 붓을 던지고 전선으로 달려간 문관 원숭환 - 홍이포를 활용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침공을 막아낸 명나라 최후의 명장이자 비운의 충신.이 홀로 결사반대했다. 그는 '관문 안에서만 버티다 산해관마저 뚫리면 나라는 끝장'이라며, 적의 칼날 바로 앞이자 산해관 밖 100km 전방에 고립되어 있던 영원성 - 영원성(현 랴오닝성 싱청 고성)은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좁은 해안 통로인 요서 회랑에 위치한 명나라 시대의 핵심 석조 요새입니다. 사각형의 높은 화강암 성벽과 사방의 옹성, 네 귀퉁이에 돌출된 치성(포루)을 갖추어 적의 접근을 다각도에서 차단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지어졌습니다.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 명장 원숭환은 성벽 위에 서양식 중포인 홍이포를 집중 배치하여 누르하치가 이끄는 13만 후금 팔기군을 격퇴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로 후금의 연승 행진이 꺾였으며,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4대 고성 중 하나로 꼽힙니다.을 최전방 방파제로 삼아 결사 항전을 선언했다. 원숭환은 영원성을 돌벽으로 단단히 수축하고, 포르투갈 상선에서 들여온 서양식 대형 전장포인 홍이포 - 홍이포(紅夷砲)는 명나라 말기 네덜란드 상선과 포르투갈(마카오)을 통해 들어온 무겁고 강력한 유럽식 청동·철제 대포(컬버린포)를 가리킵니다. '홍이(紅夷)'란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붉거나 밝은 갈색 머리칼을 가진 네덜란드인 등 서양인을 '붉은 털의 오랑캐(홍모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즉 '서양 오랑캐의 대포'라는 뜻입니다. 훗날 중원을 장악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도 오랑캐 취급을 받을까 꺼려하여 발음이 같은 '옷 의(衣)' 자를 써서 '홍의포(紅衣砲)'로 고쳐 부르기도 했습니다.이 대포는 길고 두꺼운 포신을 가진 '전장식(前裝式)' 구조였습니다. 전장식이란 오늘날 총포처럼 뒤를 열어 장전하는 후장식과 달리, 화약과 쇠구슬 포탄을 대포의 '앞쪽 구멍(포구)'으로 차례로 밀어 넣어 꼬챙이로 다지는 방식입니다. 앞쪽으로 장전해야 해서 재장전 시간은 더 걸렸지만, 대포 뒤쪽이 하나의 통쇠로 굳건히 막혀 있어 화약의 폭발 압력을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서양의 정밀한 주조 기술과 맞물려 기존 중국 화포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길었고, 성벽을 산산조각 낼 만큼 파괴력이 뛰어났습니다.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 명장 원숭환은 성벽 위에 홍이포를 배치하여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 기병대를 맹렬한 포격으로 격퇴하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막강한 화력에 큰 충격을 받은 청나라 역시 투항한 한족 기술자들을 포섭해 홍이포를 대량으로 자체 주조하기 시작했고, 이후 명나라의 관문과 성벽을 부수고 중원을 정복하는 핵심 공성 무기로 적극 투입했습니다.를 성벽에 촘촘히 배치했다. 1626년 누르하치가 13만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을 에워싸고 맹공을 퍼부었으나, 성벽에서 쏟아지는 홍이포의 맹렬한 십자 포격에 후금 기병대는 참패를 당했다. 생애 첫 패배를 겪은 누르하치는 포격 부상의 후유증으로 얼마 뒤 사망했고, 뒤를 이은 홍타이지 -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칭제 건원하며,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원 정복의 기틀을 완성한 황제. 역시 영원성을 넘지 못했다. 정면 돌파가 막힌 홍타이지는 1629년 군대를 서쪽으로 크게 돌려 몽골 초원을 거쳐 방비가 허술한 만리장성의 북서쪽 관문들을 부수고 수도 베이징 턱밑까지 전격 침공했다. 원숭환이 밤낮으로 달려와 성 밖에서 청군을 결사 저지하자, 홍타이지는 붙잡아 둔 명나라 환관에게 '원숭환과 내통하기로 했다'는 거짓 대화를 엿듣게 한 뒤 일부러 탈출시키는 치밀한 반간계(이간책)를 펼쳤다. 적군이 황궁 앞마당까지 들이닥친 데다 평소 의심이 많았던 숭정제는 이 덫에 걸려들어, 전장에서 피 흘려 나라를 구한 원숭환을 체포하고 잔혹하게 처형하는 치명적인 자멸의 실책을 범했다.
원숭환이 사라진 뒤 청 태종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복속시키고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명나라의 배후였던 조선을 굴복시켰다. 한편 명나라 내부는 소빙하기 - 소빙하기는 대략 14세기 초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지구의 평균 기온이 평년보다 현저히 낮아졌던 한랭한 기후 시기를 말합니다. 태양 활동의 감소와 잇따른 화산 폭발로 인해 발생했으며, 혹독한 겨울과 극심한 봄 가뭄, 메뚜기 떼의 창궐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특히 17세기 전반에는 동아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농업 생산량이 폭락하여 대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명나라에서는 굶주린 농민들이 이자성을 중심으로 거대한 반란을 일으켜 왕조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고,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의 참상이 극대화되는 등 전 세계적인 사회적 격변(17세기 위기)을 촉발했습니다.에 따른 최악의 대기근과 메뚜기 떼의 습격, 그리고 국경 전선의 막대한 전쟁 비용을 메우기 위해 백성들에게 강제로 덧붙여 걷은 가혹한 특별 세금(요향)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역참에서 해고당한 역졸 출신의 이자성 - 소빙하기 대기근 속에 굶주린 백성들을 규합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순나라를 세웠으나, 산해관에서 청군에 패하며 몰락한 농민 반란의 영웅.은 굶주린 농민들을 규합하여 거병했다. 그는 부패한 탐관오리의 창고를 털어 곡식을 나누어주고 "토지를 균등히 나누고 세금을 면제한다(균전면부)"는 파격적인 구호를 내걸어 백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적진을 거침없이 돌파하는 왕'이라는 뜻의 '틈왕(闖王)'이라 불렸다. 1641년 황허강의 요충지 낙양을 함락시키고 1644년 초 서안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라 '대순(大順, 순나라)'을 건국한 이자성은 파죽지세로 수도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마침내 1644년 4월 베이징 성문이 열리자, 절망에 빠진 숭정제는 자금성 바로 북쪽의 경산(매산) - 경산(景山)은 중국 베이징 자금성 바로 북쪽에 맞닿아 있는 인공 산이자 황실 정원입니다. 명나라 영락제가 자금성을 건설하고 궁궐을 둘러싼 인공 연못과 해자(통자하)를 팔 때 파낸 흙을 쌓아 올려 조성했습니다. 궁궐 뒤편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석탄을 대량으로 묻어두었다는 민간 전설 때문에 오랫동안 '매산(煤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불렸습니다.풍수지리적으로는 황제가 거처하는 자금성의 북쪽을 든든하게 받쳐주어 차가운 북풍과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수호산(진산·鎭山) 역할을 했습니다. 산마루에 다섯 개의 정자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황실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베이징 성 전체와 황궁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최고의 조망 명소로 쓰였습니다.1644년 4월,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을 탈출해 경산 동쪽 기슭의 회화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베이징 시내와 자금성의 웅장한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유서 깊은 '경산공원'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에 올라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함으로써 276년간 이어진 명나라 황조는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다.
베이징이 순나라 군대에게 함락되자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최고 사령관(총병) 오삼계 - 산해관 문을 열어 청군을 불러들이고 중원 정복에 앞장섰으나 말년에 반란을 일으킨 격동의 풍운아.는 앞뒤로 적을 마주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자금성에 입성한 이자성의 군대는 점차 규율을 잃고 약탈을 일삼았고, 부하 장수가 오삼계의 부친을 투옥하고 애첩 진원원을 빼앗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가문의 치욕에 분노한 오삼계는 만리장성의 빗장을 열고 적대하던 청군을 끌어들이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섭정왕 도르곤 - 어린 순치제를 대신해 청나라를 이끈 섭정왕이자,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하고 청의 중원 정복을 완성한 핵심 지도자.이 이끄는 청나라 팔기군과 오삼계군은 1644년 5월 산해관 일편석 전투에서 거센 모래바람 속에 이자성이 세운 순나라 군대(순군)를 궤멸시키고 자금성에 무혈입성했다. 청나라는 중원의 민심을 수습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숭정제의 장례를 국가적 예우로 치르고 명나라 관료들을 적극 등용하는 유화책을 펼쳤다.
이후 청군은 양쯔강 이남으로 피신한 남명 정권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만주족 고유의 머리 모양을 강요하는 변발령 - 변발령은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를 정복한 후, 모든 한족 남성들에게 만주족 고유의 머리 모양인 변발을 하도록 강제한 국가적 명령입니다. 이마와 앞머리를 넓게 삭발하고 정수리와 뒷머리만을 땋아 길게 늘어뜨리는 스타일로, 청 황조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시험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머리를 보존하려는 자는 머리칼을 잃을 것이요, 머리칼을 보존하려는 자는 목이 잘릴 것이다(유두불유발, 유발불유두)"라는 무자비한 집행 아래 수많은 한족 사대부와 백성들이 저항하다 학살당했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유교 전통을 꺾고 만주족 지배를 공고히 한 상징적 정책입니다.을 시행하며 통치권을 확립해 나갔다. 1673년에는 남쪽 영지를 다스리던 오삼계 등 세 명의 한족 장수들이 반란(삼번의 난 - 삼번의 난은 1673년부터 1681년까지 청나라 남부의 광대한 영지를 다스리던 세 명의 한족 번왕(오삼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이 청 황실에 맞서 일으킨 8년간의 거대한 반란입니다. 이들은 명나라 정벌에 앞장선 대가로 운남, 광동, 복건 일대에서 사병을 거느리고 막대한 조세를 거두며 독립 왕국처럼 군림하고 있었습니다.젊은 강희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을 폐지(철번)하려 하자, 오삼계가 명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깃발을 들었습니다. 한때 양쯔강 이남 전체를 장악하며 청나라를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빠뜨렸으나, 연합군의 내분과 강희제의 철저한 보급 차단 및 지구전 끝에 1681년 완전히 평정되었습니다.)을 일으켰으나 강희제의 치밀한 작전으로 8년 만에 진압되었다. 마지막으로 1683년 대만에서 바다를 무대로 저항하던 정성공의 정씨 왕국까지 수군 제독 시랑의 함대에 항복하면서, 청나라는 65년에 걸친 대전쟁을 마무리 짓고 광대한 영토와 다민족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