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았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등 당시 유럽을 주름잡던 세 명의 군주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먼저 육로로 진군한 신성 로마 제국의 대군은 이슬람 군대를 연파하며 맹위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1190년 6월 10일, 아나톨리아의 살레프 강을 건너던 중 프리드리히 1세가 갑작스럽게 익사하는 청천벽력 같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68세의 늙은 황제는 무더운 여름날 무거운 강철 갑옷을 입고 오랜 행군을 한 탓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면서 온도 차를 이기지 못해 심장마비 쇼크를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말이 미끄러지면서 강물에 빠지자, 무거운 전신 철갑옷의 무게 때문에 거센 강물에서 헤엄쳐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휩쓸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큰 기대를 모았던 위대한 지도자를 허무하게 잃자 대군은 큰 충격에 빠져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고, 십자군은 성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가장 강력한 핵심 전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편, 십자군 세력은 이슬람의 요충지인 아크레 항구를 2년 가까이 포위하고 있었으나 살라딘의 외부 포위망에 갇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1191년 바다를 통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합류하면서 전세가 급변했습니다. 리처드 1세의 강력한 투석기 공격과 뛰어난 전술로 마침내 아크레는 십자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아크레를 점령한 기쁨도 잠시, 십자군의 두 중심인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고향 유럽에서부터 땅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이었는데, 원정 과정에서 전리품 분배 문제와 예루살렘 왕국의 다음 왕을 누구로 세울지를 두고 의견이 갈려 크게 대립했습니다. 게다가 리처드가 필리프의 누이와의 약혼을 깨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습니다. 결국 아크레를 점령한 직후, 필리프 2세는 건강 문제와 고국의 정치를 핑계로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고, 리처드 1세가 홀로 원정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십자군을 향해 살라딘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궁병으로 쉴 새 없이 기습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철저한 방어 대형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중장기병의 총공격을 감행, 살라딘의 대군을 완전히 패퇴시키며 그의 무적 신화를 깼습니다.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길어진 보급로와 살라딘의 청야 전술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후퇴했습니다. 이 틈을 타 살라딘이 요충지인 자파를 기습 점령하자, 리처드 1세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급습하여 극적으로 자파를 재탈환했습니다. 장기전으로 지친 양측은 서로의 실력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고, 마침내 1192년 평화 협정(라믈라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영토로 남겨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무기 없이 안전하게 방문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보장하며, 아크레를 비롯한 해안 거점들은 십자군령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훗날까지 회자되는 두 영웅의 맞대결과 타협으로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