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 - 이집트와 시리아의 첫 번째 술탄이자 아이윱 왕조의 창시자로,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했습니다.이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하고 성지 예루살렘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3대 종교에서 모두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중동의 고대 도시입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과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핵심 목표물이었습니다.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며, 이슬람교에서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바위 사원(황금 돔)과 알 아크사 사원이 있는 성지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이자 신성한 성전이 서 있던 중심지입니다.이 도시에는 흥미로운 전설들이 전해집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황후가 진짜 성십자가를 찾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세 개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병에 걸린 여인에게 십자가를 갖다 대었더니, 세 번째 십자가가 닿는 순간 여인의 병이 기적처럼 나았다는 신비한 치유 전설이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전설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날개 달린 말인 부라크를 타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의 아크사 사원으로 날아와 하늘로 승천하는 밤의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을 되찾았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소식은 유럽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고,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강력한 앙주 왕가에서 태어나, 1189년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남서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 -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으나, 아크레를 점령한 직후 질병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일찍 귀국한 프랑스의 국왕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은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식으로 시작된 중세 유럽의 제국으로, 선제후들이 황제를 뽑고 교황청과 권력을 견주었던 연합 제국입니다.의 프리드리히 1세 -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로 불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대군을 이끌었으나 성지에 도착하기 전 강에서 익사했습니다.(바르바로사) 등 당시 유럽을 주름잡던 세 명의 군주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먼저 육로로 진군한 신성 로마 제국의 대군은 이슬람 군대를 연파하며 맹위를 떨쳤습니다. 하지만 1190년 6월 10일, 아나톨리아 - 소아시아라고도 불리는 서아시아의 거대한 반도로,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에 해당합니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발상지이자 동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히타이트, 로마, 비잔티움, 셀주크 제국 등 다양한 문명이 거쳐갔습니다.십자군 전쟁 당시 서유럽의 군대들이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험난한 육로이기도 했습니다.의 살레프 강 -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의 괴크수 강으로 불리는 살레프 강은 타우루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흘러드는 강입니다.이 강은 1190년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가 갑작스럽게 익사한 비극적인 장소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그의 허망한 죽음으로 인해, 가장 강력했던 독일 십자군은 지도자를 잃고 성지에 닿기도 전에 대부분 해산하고 말았습니다.을 건너던 중 프리드리히 1세가 갑작스럽게 익사하는 청천벽력 같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68세의 늙은 황제는 무더운 여름날 무거운 강철 갑옷을 입고 오랜 행군을 한 탓에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면서 온도 차를 이기지 못해 심장마비 쇼크를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말이 미끄러지면서 강물에 빠지자, 무거운 전신 철갑옷의 무게 때문에 거센 강물에서 헤엄쳐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휩쓸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큰 기대를 모았던 위대한 지도자를 허무하게 잃자 대군은 큰 충격에 빠져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고, 십자군은 성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가장 강력한 핵심 전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편, 십자군 세력은 이슬람의 요충지인 아크레 - 아크레(오늘날의 아코)는 고대부터 이어진 길고 풍부한 역사를 지닌 레반트 지역의 성곽 항구 도시입니다.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후, 십자군 왕국의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특히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살라딘과 격돌한 아크레 공성전(1189~1191년)의 무대로 유명하며, 1291년 맘루크 왕조에게 이곳이 최종적으로 함락되면서 십자군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항구를 2년 가까이 포위하고 있었으나 살라딘의 외부 포위망에 갇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1191년 바다를 통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합류하면서 전세가 급변했습니다. 리처드 1세의 강력한 투석기 공격과 뛰어난 전술로 마침내 아크레는 십자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아크레를 점령한 기쁨도 잠시, 십자군의 두 중심인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고향 유럽에서부터 땅을 두고 다투던 라이벌이었는데, 원정 과정에서 전리품 분배 문제와 예루살렘 왕국 - 예루살렘 왕국은 1099년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성공한 서유럽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레반트 남부(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일대)에 세운 십자군 국가입니다. 십자군 국가들 중 가장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국가로, 기독교 제일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다스렸습니다. 첫 번째 통치자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곳에서 황금 왕관을 쓸 수 없다며 '성묘 수호자'를 자처했으나, 그의 사후 동생인 보두앵 1세가 뒤를 이어 최초의 예루살렘 국왕으로 정식 즉위했습니다. 이 왕국은 약 2세기 동안 중동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으며 기독교 성지를 수호하고 유럽과 중동 문화를 잇는 독특한 융합의 장이 되었으나, 살라딘을 비롯한 주변 이슬람 세력의 거센 반격과 압박 끝에 1291년 마지막 요새인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최종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의 다음 왕을 누구로 세울지를 두고 의견이 갈려 크게 대립했습니다. 게다가 리처드가 필리프의 누이와의 약혼을 깨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습니다. 결국 아크레를 점령한 직후, 필리프 2세는 건강 문제와 고국의 정치를 핑계로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고, 리처드 1세가 홀로 원정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십자군을 향해 살라딘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궁병으로 쉴 새 없이 기습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철저한 방어 대형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중장기병의 총공격을 감행, 살라딘의 대군을 완전히 패퇴시키며 그의 무적 신화를 깼습니다.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근방까지 진격했지만, 길어진 보급로와 살라딘의 청야 전술 - 청야 전술은 적군이 아군 영토로 쳐들어올 때, 적군이 현지에서 식량이나 물, 잠잘 곳 등을 얻지 못하도록 아군 스스로가 농작물을 불태우고 우물을 메우거나 파괴하는 방어 전술입니다. '들판을 깨끗이 비운다'는 한자어 뜻대로, 적의 보급을 끊어 스스로 지치고 굶주려 후퇴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 오는 십자군 군대를 상대로 이 청야 전술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십자군이 지나갈 길목의 곡식들을 미리 싹 태워버리고 우물을 오염시키거나 돌로 메워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뛰어난 전투력을 가졌음에도 심각한 목마름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결국 예루살렘 성을 눈앞에 두고 보급 한계에 부딪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후퇴했습니다. 이 틈을 타 살라딘이 요충지인 자파를 기습 점령하자, 리처드 1세는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급습하여 극적으로 자파를 재탈환했습니다. 장기전으로 지친 양측은 서로의 실력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고, 마침내 1192년 평화 협정(라믈라 협정 - 라믈라 협정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끝무렵인 1192년 9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사이에 맺어진 평화 조약입니다. 이 협정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인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 하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순례자들과 상인들이 무기를 지니지 않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방문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했습니다. 또한 야파에서 두르(티레)에 이르는 해안가 영토는 기독교인들의 영토로 인정되었으나, 군사적 요충지였던 아스칼론의 성벽은 모두 허물기로 합의했습니다.이 협정 덕분에 양측의 치열한 전쟁이 멈추었고, 사자심왕 리처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십자군 국가들은 해안 지대에서 약 100년 동안 더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을 체결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영토로 남겨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무기 없이 안전하게 방문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보장하며, 아크레를 비롯한 해안 거점들은 십자군령으로 인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훗날까지 회자되는 두 영웅의 맞대결과 타협으로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