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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술탄

쿠르드계 / 아이윱 왕조 술탄 1137/1138년 ~ 1193년 (나이: 56세)
"나의 적은 순례자가 아니라 전쟁을 끌고 오는 자들이다."
— 평화로운 순례자와 무장 침략자를 구분했다는 살라딘의 태도를 전하는 후대 전승.

생애

서양에서 살라딘으로 널리 알려진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윱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첫 번째 술탄이자 아이유브 왕조의 창건자입니다. 이라크 티크리트의 쿠르드계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삼촌 쉬르쿠 휘하에서 군사 경력을 시작하여 시리아 젠기 왕조의 누르 앗딘을 섬겼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정의로움과 신사적인 태도로 적들에게까지 칭송받은 지혜로운 군주였습니다.

파티마 왕조의 종식과 이슬람 세계의 통일

살라딘은 이집트로 파견되어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최고 관직인 재상(Vizier)에 올랐습니다. 1171년 파티마의 마지막 칼리파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를 폐지하고 수니파인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를 통해 이집트의 거대한 영토와 풍요로운 재정을 상속받은 그는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예멘 등을 차례로 합치며 흩어져 있던 이슬람 세계를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이는 분열된 세력을 하나로 모아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이었습니다.

하틴 전투의 대승과 예루살렘 탈환

1187년,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연합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키는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를 발판 삼아 그는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공성전 끝에 88년 만에 마침내 되찾았습니다.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무차별 학살을 벌였던 것과 달리, 살라딘은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노예가 되지 않도록 몸값을 면제해 주며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이 자비로운 조치는 적국이었던 유럽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어 기사도의 모범으로 기억되게 했습니다.

3차 십자군에 맞선 청야 전술과 최후

제3차 십자군 원정(1189~1192년)이 시작되자, 살라딘은 일생일대의 난적인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격돌했습니다.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 중장기병의 강력함을 꿰뚫어 본 살라딘은 정면충돌을 피하는 대신,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의 곡식을 불태우고 우물을 돌로 메워 파괴하는 청야 전술을 완벽하게 펼쳤습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아르수프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보급 부족과 극심한 갈증으로 인해 예루살렘 공략을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결국 1192년 라믈라 협정을 맺어 예루살렘을 이슬람 영토로 보존하는 동시에 기독교 순례자의 안전한 통행을 허용했습니다. 살라딘은 1193년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으며, 백성들에게 모든 재산을 나누어주어 장례를 치를 돈조차 남기지 않은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