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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고승 / 역경승

쿠차(서역) / 후진 국사 344년 ~ 413년 (나이: 69세)
"내가 번역한 경전에 오류나 거짓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뒤에도 내 혀만은 결코 타지 않을 것이다."
— 장안에서 입적을 앞두고 자신의 번역이 부처의 진의를 정확히 담아냈음을 확신하며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

생애

구마라집(쿠마라지바, 344~413)은 서역 쿠차 왕국 출신의 위대한 대승불교 고승이자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불경 번역가(역경승)입니다. 인도 귀족 출신의 아버지와 쿠차 왕의 누이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이 비범한 지혜를 떨쳤으며, 5호 16국의 격동하는 전란 속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방대한 불교 경전들을 유려하고 정확한 한문으로 옮겨 동아시아 불교 사상의 확고한 토대를 세웠습니다.

쿠차 왕국에서의 출생과 구도 여행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한 구마라집은 카슈미르 등 북인도를 유학하며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인도 철학과 천문학을 두루 섭렵했습니다. 서역 일대에서 최고의 학승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는 고국 쿠차로 돌아와 대승불교를 널리 전파했습니다. 그의 높은 학식과 도덕성은 멀리 중원 땅에까지 전해져 전진의 황제 부견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전란의 소용돌이와 17년간의 억류

384년, 부견은 명장 여광에게 대군을 주어 서역을 정벌하게 하며 반드시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모셔오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여광이 쿠차를 함락시키고 구마라집을 데려오던 중 전진이 비수대전 패배로 무너지자, 여광은 양주(간쑤성)에 머물며 후량을 건국했습니다. 불교를 믿지 않던 여광은 구마라집을 17년 동안 억류하며 모욕을 주기도 했지만, 구마라집은 이 고난의 세월 동안 한문과 중국 문화를 완벽하게 통달하며 훗날의 위대한 번역을 준비했습니다.

장안에서의 국가적 역경과 불교의 융성

401년, 후진의 군주 요흥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구마라집을 극진한 예우로 수도 장안으로 맞이하여 국사(國師)로 삼았습니다. 요흥의 전폭적인 국가 지원 아래 초당사와 서명각에 대규모 역경원이 세워졌고, 수백 명의 뛰어난 승려들이 모여들어 국가적인 불경 번역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구마라집은 묘법연화경, 금강경, 아미타경, 유마경을 비롯해 나가르주나(용수)의 중론 등 74부 384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원문의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중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체로 옮긴 그의 번역은 오늘날까지 동아시아 사찰에서 독송되는 표준 경전이 되었습니다.

최후와 '타지 않은 혀'의 전설

구마라집은 413년 장안에서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번역한 경전에 한 글자의 오류나 거짓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뒤에도 내 혀만은 결코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장례를 치른 뒤 온몸이 재가 되었음에도 그의 혀만은 붉은 연꽃처럼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사리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의 번역과 사상은 삼론종과 천태종, 선종의 모태가 되어 동아시아 정신문화에 지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