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맺은 '해상의 맹약' 과정에서 송나라 - 송나라는 960년부터 1279년까지 지속된 중국의 왕조입니다. 송 태조가 후주의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으며, 5대 10국 시대를 종식시켰습니다.는 뼈아픈 군사적 무능함을 금나라 - 1115년부터 1234년까지 중국 북부와 동북부 지역을 통치했던 여진족의 왕조입니다. 창건자 아구다는 '철(요나라)은 녹슬지만 금(금나라)은 결코 변하지 않고 순수하다'는 전설적인 선언과 함께 국호를 '금'으로 정했다고 전해집니다. 강력한 철갑기병 정예군을 앞세워 번성했으나, 결국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에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송나라는 약속된 세폐(나라 간에 평화를 위해 바치던 돈이나 물건) 지급을 미루면서, 금나라 몰래 옛 요나라 출신 반란 장수 장각을 받아들이고 도망친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와 비밀 밀서를 주고받으며 금나라를 협공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내통 사실을 파악한 금나라는 송나라가 동맹의 신의를 저버렸다고 간주하여 1125년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거침없이 남하한 금군에 의해 1127년 수도 개봉 - 개봉은 옛날에 변경 또는 대량이라고도 불렸던 곳으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룬 도시 중 하나입니다. 황하 강 근처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북송(송나라)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개봉은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대도시였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인공 강인 변하(중국 대운하의 일부)를 통해 온갖 맛있는 음식과 비단, 진귀한 물건들을 실은 배들이 밤낮으로 끊임없이 오갔고, 이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은 동양화의 보물로 꼽히는 그림인 '청명상하도'에 잘 담겨 있습니다.개봉에는 흥미로운 전설들이 많이 전해 내려옵니다. 당시 개봉은 밤에도 등불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밤새도록 밝은 도시)이었는데, 변하에는 신비로운 황금 잉어가 살고 있어서 물건을 실은 배들이 가라앉지 않도록 지켜주었다는 따뜻한 백성들의 설화가 있습니다. 또한, 개봉은 억울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도와주었던 청렴한 판관인 '포청천'(포대인)에 관한 이야기로도 유명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포청천은 이마에 신비로운 초승달 모양의 흉터가 있었는데, 낮에는 개봉에서 억울한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밤에는 저승에 가서 귀신들을 재판하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고 전해집니다.하지만 1127년, 신흥 금나라의 강력한 기병들이 쳐들어와 수도 개봉을 함락하고 황제들을 사로잡아 간 역사적 비극인 '정강의 변'이 발생하면서 찬란했던 개봉의 송나라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황제들은 사로잡히고 송나라는 남쪽으로 쫓겨갔지만, 개봉은 오늘날까지도 찬란한 문화와 정의로움의 상징으로 역사 속에 깊이 기억되고 있습니다.이 점령되고, 흠종 - 북송의 제9대이자 마지막 황제로, 금나라의 침공 속에서 아버지 휘종에게 제위를 물려받아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수도 개봉의 함락으로 사로잡혀 나라의 멸망을 지켜본 비극적인 황제입니다.과 그의 아버지 휘종 - 송나라의 제8대 황제로 예술과 서예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으나, 나랏일과 국방을 멀리하여 북송이 멸망하는 비극을 불러온 인물입니다.을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북쪽으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 - 1127년 여진족의 금나라 군대가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카이펑)을 함락시키고 황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가면서 북송이 멸망하게 된 엄청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금나라 군대는 수도에 있던 막대한 금은보화를 빼앗았고, 당시 황제였던 흠종과 그의 아버지였던 예술가 황제 휘종을 비롯해 수천 명의 왕족과 귀족, 기술자들을 포로로 묶어 북쪽 땅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송나라 역사상 가장 큰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기록되었습니다.'정강'은 당시 흠종 황제가 쓰던 연호(연도를 세는 이름)였습니다. 수도를 빼앗기고 황제들까지 포로로 잡혀간 비극은 송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로 인해 악비 장군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참사 이후 살아남은 황실 가족들은 강남(양쯔강 이남) 지역으로 피난을 떠나 남송을 새로 세우게 됩니다.'이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북송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수도가 함락되고 황실 전체가 포로로 끌려가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황족 조구(고종)는 유일하게 금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벗어나 외지에 머물고 있었기에 포로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북송 황실의 유일한 적통(황제의 정식 핏줄)이자 생존자였던 조구는 백성들과 신하들의 지지를 받으며 양쯔강 남쪽의 임안(항저우)을 임시 수도로 삼아 남송을 새로 세우고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금나라 군대는 남송을 마저 무너뜨리기 위해 양쯔강을 건너 거세게 진격했으나, 한세충이 이끄는 송나라 수군이 황천탕 전투 등에서 강과 호수의 지형을 지렛대 삼아 저항을 펼쳤습니다. 비록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금나라 군대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송나라 수군의 뛰어난 물길 방어 덕분에 금나라 역시 남쪽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한계를 보였습니다. 이로써 남송은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지배력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1130년대 후반, 악비 - 남송 시대의 전설적인 장군으로, 강력한 금나라 군대에 맞서 백전백승을 거두며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 했던 충성심의 상징적인 구국 영웅입니다.를 비롯한 송나라의 무신들은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고 북쪽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구출하여 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는 북벌(북쪽 땅을 정벌함)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주선진 전투 등에서 전술적 성과를 올리며 옛 수도 개봉에 근접했습니다. 그러나 송 고종과 재상 진회 - 남송 시대의 재상으로,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주장하고 구국 영웅인 악비 장군을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음으로 몰고 간 정치가입니다.를 비롯한 조정의 주화파(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맺자고 주장하는 관리들)는 다른 생각을 품었습니다. 장기전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기에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만약 북벌이 성공하여 전임 황제인 흠종이 돌아온다면 현재 황제인 고종의 황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정통성 문제와, 무장들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조정을 위협하는 군벌(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부리는 집단)로 성장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진회는 금나라와의 타협만이 국가를 보존하는 현실적인 길이라 보고 악비에게 군대 퇴각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악비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으며, 1142년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에 소흥화의 - 1142년 남송과 여진족의 금나라 사이에 맺어진 역사적인 평화 협정으로, 두 나라 사이의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끝냈습니다. 나라를 지키려던 악비 장군이 억울하게 처형당한 직후, 평화를 원했던 재상 진회의 주도로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따라 두 나라의 국경선은 양쯔강 위쪽의 회하(화이강)와 진령산맥으로 정해졌으며, 옛 영토인 황하 북쪽의 중원 땅 전체를 금나라의 영역으로 영원히 인정하게 되었습니다.조약의 내용에 따라 남송은 금나라를 칭송하고 매년 엄청난 양의 은과 비단(세폐)을 바치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많은 애국시인들과 백성들이 이 조약을 부끄럽게 여겼으나, 이를 통해 전쟁이 멈추면서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항저우)은 풍요롭고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가 체결되었습니다. 이 평화 협정으로 남송은 중원 땅을 모두 금나라에 넘겨주고 회하 - 회하 혹은 회수(淮水)는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 사이에 흐르는 거대한 강으로, 전통적으로 중국의 남쪽과 북쪽을 나누는 자연의 기준선입니다. 1142년 소흥화의에 따라 남송과 금나라의 공식적인 영구 국경선으로 확정되면서, 남송이 중원 땅을 모두 포기하게 된 역사적인 분계선(경계를 지어 가르는 선)이기도 합니다. 회하와 관련된 옛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의 우왕이 회하의 홍수를 다스리는 치수(물길을 다스리고 다듬는 일)를 펼칠 때 이 강을 사납게 어지럽히던 괴물 원숭이 신인 무지기를 사로잡아 거북산 아래에 단단한 쇠사슬로 묶어 가두었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 무지기는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실제 모티브가 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회하의 남쪽에 심은 달콤한 귤을 북쪽에 심으면 시고 맛없는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 고사성어(옛날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널리 쓰이는 표현)의 배경이 되는 강이기도 합니다.를 공식 국경선으로 확정했습니다. 또한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를 바치는 군신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비록 남송에게는 영토를 잃고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해야 하는 계약이었으나, 양국은 이를 계기로 장기간의 전면전을 멈추고 각자의 영역에서 평화와 독자적인 문화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