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맺은 '해상의 맹약' 과정에서 송나라는 뼈아픈 군사적 무능함을 금나라에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송나라가 약속된 세폐(나라 간에 평화를 위해 바치던 돈이나 물건)의 지급을 미루고 금나라 몰래 요나라의 잔당과 내통하자, 금나라는 송나라가 동맹의 신의를 저버렸다고 여겨 1125년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습니다. 거침없이 남하한 금군에 의해 1127년 수도 개봉이 점령되고, 흠종과 그의 아버지 휘종을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북쪽으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이 발생했습니다. 이로써 북송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수도가 함락되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황족 조구(고종)는 양쯔강 남쪽의 임안(항저우)을 임시 수도로 삼아 남송을 세웠습니다. 금나라 군대는 남송을 마저 무너뜨리기 위해 양쯔강을 건너 거세게 진격했으나, 한세충이 이끄는 송나라 수군이 황천탕 전투 등에서 강과 호수의 지형을 지렛대 삼아 저항을 펼쳤습니다. 비록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금나라 군대를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송나라 수군의 뛰어난 물길 방어 덕분에 금나라 역시 남쪽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한계를 보였습니다. 이로써 남송은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지배력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1130년대 후반, 악비를 비롯한 송나라의 무신들은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고 북쪽으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구출하여 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야 한다는 북벌(북쪽 땅을 정벌함)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주선진 전투 등에서 전술적 성과를 올리며 옛 수도 개봉에 근접했습니다. 그러나 송 고종과 재상 진회를 비롯한 조정의 주화파(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맺자고 주장하는 관리들)는 다른 생각을 품었습니다. 장기전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기에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만약 북벌이 성공하여 전임 황제인 흠종이 돌아온다면 현재 황제인 고종의 황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정통성 문제와, 무장들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조정을 위협하는 군벌(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부리는 집단)로 성장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진회는 금나라와의 타협만이 국가를 보존하는 현실적인 길이라 보고 악비에게 군대 퇴각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악비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으며, 1142년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에 소흥화의가 체결되었습니다. 이 평화 협정으로 남송은 중원 땅을 모두 금나라에 넘겨주고 회하를 공식 국경선으로 확정했습니다. 또한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를 바치는 군신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비록 남송에게는 영토를 잃고 굴욕적인 조건을 감수해야 하는 계약이었으나, 양국은 이를 계기로 장기간의 전면전을 멈추고 각자의 영역에서 평화와 독자적인 문화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