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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년 – 382년

고트 전쟁 (376년–382년)

훈족을 피해 도망쳐온 고트족의 대규모 이주로 시작되어, 로마군이 괴멸되고 황제가 전사한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로 정점에 달한 동로마 제국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이후 시기로, 황제가 통치하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의 재앙적인 전쟁입니다.

위치로마 제국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이후 시기로, 황제가 통치하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트라키아 - 그리스 본토 북동쪽, 헬레스폰트로 이어지는 길목의 지역입니다. 풍부한 목재와 광산이 있어 흑해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모두 군사 행동을 펼쳤습니다. 지방 (현 불가리아 및 터키)
교전국로마 제국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이후 시기로, 황제가 통치하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서고트족(고트족) 및 알란족

배경 및 맥락

376년

도나우강 도하

376년, 훈족이 도나우강 - 도나우강(라틴어: 다누비우스)은 로마 제국과 북쪽의 게르만 및 스키타이 부족 사이의 경계를 형성했습니다. 강을 따라 '다뉴브 리메스'라고 불리는 보루와 군단 기지들이 촘촘하게 건설되어 요새화되었습니다. 대이동 시기인 376년 고트족의 도나우강 도하는 서로마의 통제력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북쪽의 고트족 거주지를 공격했습니다. 절박해진 프리티게른 - 프리티게른은 고트족의 지혜로운 지도자였습니다. 훈족 때문에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로마 제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관리들이 너무 욕심이 많아서 고트족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가고 괴롭혔습니다. 굶주리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프리티게른은 로마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그는 기병대를 이용한 멋진 작전으로 로마군을 깜짝 놀라게 하며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 덕분에 고트족은 로마 땅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심의 테르빙기 고트족은 발렌스 황제 - 고트족과 사산 제국의 위협에 맞섰으며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동로마 황제입니다.에게 로마 제국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이후 시기로, 황제가 통치하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내로의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발렌스는 이들을 군사로 활용할 생각에 허락했지만, 현지의 로마 관리들은 부패했고 굶주린 고트족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식량을 강매하는 등 가혹하게 착취했습니다.

376년

고트족의 반란

학대와 기근을 견디다 못한 고트족은 결국 폭발했습니다.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 열린 연회 도중 소동이 일어났고, 프리티게른은 백성들을 이끌고 로마에 대항해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착취당하던 다른 고트족과 심지어 일부 로마 광산 노동자들까지 합세하면서, 이들은 트라키아 - 그리스 본토 북동쪽, 헬레스폰트로 이어지는 길목의 지역입니다. 풍부한 목재와 광산이 있어 흑해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모두 군사 행동을 펼쳤습니다. 지방을 휩쓰는 거대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전개 과정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동방에 머물던 발렌스 황제 - 고트족과 사산 제국의 위협에 맞섰으며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동로마 황제입니다.는 고트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발칸반도로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그는 378년 여름 하드리아노폴리스 -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하드리아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전투는 378년에 일어났으며, 여기서 로마군은 고트족에게 대패했습니다.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에 도착했습니다. 서방 황제인 조카 그라티아누스가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경고했지만, 발렌스는 승리의 영광을 홀로 차지하려는 생각에 즉시 고트족 진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는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시작되었습니다. 더위 속에 긴 행군을 하느라 지치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로마 보병들은 처음에는 고트족의 마차 진영을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식량을 구하러 나가 있던 고트족 기병대가 갑자기 돌아와 로마군의 측면을 강타했습니다. 로마군의 전열은 무너졌고, 이어진 학살 속에서 로마군의 3분의 2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발렌스 황제 본인도 전사했으며,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의 패배는 역사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게르만 부족이 로마 땅에서 로마 야전군을 격파하고 그곳에 계속 머물게 된 것입니다. 새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결국 382년 고트족이 자치권을 가진 민족으로서 제국 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이는 추후 서로마 제국 - 고대 로마의 공화정 이후 시기로, 황제가 통치하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이 분열되고 멸망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비록 사건은 동로마에서 일어났지만, 과거에는 패배한 이민족을 노예로 팔거나 흩어지게 했던 것과 달리, 이번 조약은 고트족이 자신들의 지도자 아래 무장한 채로 제국 영토 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 고트족은 서로마로 이동해 서고트 왕국을 세웠고, 이 '무장 정착' 모델은 다른 부족들에게도 적용되어 서로마 제국의 영토가 분할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주요 사건

376년

도나우강 - 도나우강(라틴어: 다누비우스)은 로마 제국과 북쪽의 게르만 및 스키타이 부족 사이의 경계를 형성했습니다. 강을 따라 '다뉴브 리메스'라고 불리는 보루와 군단 기지들이 촘촘하게 건설되어 요새화되었습니다. 대이동 시기인 376년 고트족의 도나우강 도하는 서로마의 통제력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도하

📍도나우강 (지도 보기)

훈족을 피해 약 20만 명의 고트족이 도나우강 - 도나우강(라틴어: 다누비우스)은 로마 제국과 북쪽의 게르만 및 스키타이 부족 사이의 경계를 형성했습니다. 강을 따라 '다뉴브 리메스'라고 불리는 보루와 군단 기지들이 촘촘하게 건설되어 요새화되었습니다. 대이동 시기인 376년 고트족의 도나우강 도하는 서로마의 통제력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을 건너 로마 영토로 들어오기를 청원했습니다. 처음에는 난민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부패한 로마 관리들의 잔혹한 착취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377년

마르키아노폴리스 전투

📍마르키아노폴리스 (현 불가리아 데브냐) (지도 보기)

로마 사령관 루피키누스는 고트족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을 연회에 초대했습니다. 함정임을 눈치챈 프리티게른 - 프리티게른은 고트족의 지혜로운 지도자였습니다. 훈족 때문에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로마 제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관리들이 너무 욕심이 많아서 고트족 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가고 괴롭혔습니다. 굶주리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프리티게른은 로마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그는 기병대를 이용한 멋진 작전으로 로마군을 깜짝 놀라게 하며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 덕분에 고트족은 로마 땅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은 연회장을 탈출하여 즉시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괴멸되었습니다.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하드리아노폴리스 (현 터키 에디르네) (지도 보기)

공명심에 사로잡힌 발렌스 황제 - 고트족과 사산 제국의 위협에 맞섰으며 378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한 동로마 황제입니다.는 서방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로마군은 고트 기병대에 포위되어 전멸했고, 발렌스를 포함한 병력의 3분의 2가 사망하여 칸나에 전투 이후 최악의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결과고트족의 결정적 승리
휴전 / 공백기 (4년)
382년

382년 평화 조약

📍콘스탄티노폴리스 (지도 보기)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고트족을 '페데라티(동맹)'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전의 피지배민들과 달리, 이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자신들의 지도자 아래 무장한 채로 제국 영토 내에 거주하는 자치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술 및 유산

은빛 성서(코덱스 아르겐테우스)

은빛 성서(코덱스 아르겐테우스)

동고트 지배자를 위해 필사, 번역은 울필라스 주교, 번역은 4세기, 이 사본은 500년경

🏛️ 웁살라 대학 도서관, 스웨덴

보라색으로 물들인 양피지에 은과 금 잉크로 고트어 복음서를 적은 책이다. 울필라스 주교는 자기 민족에게 성서를 전하려고 알파벳을 새로 만들었다. 그는 고트인이 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안다고 여겨 열왕기를 번역에서 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테오도시우스 은접시

테오도시우스 은접시

황실 은세공 공방, 388년

🏛️ 왕립역사아카데미, 마드리드, 에스파냐

지름이 75센티미터에 이르는 은접시로, 황제가 관리에게 문서를 건네고 뒤로는 게르만계로 보이는 호위병들이 서 있다.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참패 뒤 시작된 치세의 10주년 선물로 만들어졌다. 고트인이 제국 안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게 된 새로운 관계가 조용히 드러난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로마사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로마사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390년경

🏛️ 가장 오래된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 로마

그리스어를 쓰던 퇴역 군인이 라틴어로 쓴 책으로, 고트인의 도나우강 도하와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를 가장 자세히 전한다. 그는 로마 관리들이 피란민을 굶기고 속여 결국 봉기하게 만들었다고 적었다. 자기 편을 두고 이렇게 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관련 영상

아드리아노플 전투(378년, 로마 보병 VS 서고트 기병)

역사 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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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우강을 건넌 고트족이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