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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보헤미아 국왕

룩셈부르크 왕가 (신성 로마 제국) 1368 – 1437 (나이: 69세)
"공의회의 결정은 황제의 약속보다도 높고 무겁다."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얀 후스의 신변 보장 철회를 변명하며

생애

지기스문트(1368~1437)는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군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국왕을 역임했습니다. 서구 교회의 40년 대분열을 수습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으나, 얀 후스의 처형과 후스 전쟁의 발발을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과 니코폴리스의 패배

지기스문트는 1368년 뉘른베르크에서 명군 카를 4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정략결혼을 통해 138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동유럽으로 팽창하던 오스만 제국을 막기 위해 1396년 서유럽 기사단을 소집하여 야심 차게 감행한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에게 참패를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와 얀 후스의 화형

1410년 독일의 왕(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된 지기스문트는 3명의 교황이 난립하던 서구 교회의 대분열(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공의회는 단일 교황을 선출하며 교회의 분열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이단으로 단죄했습니다. 지기스문트는 후스에게 황제의 인장이 찍힌 안전통행권을 발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의 압박에 굴복하여 후스가 화형대에 오르는 것을 묵인했습니다. 이 배신은 보헤미아인들의 가슴속에 지기스문트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증오를 심었습니다.

후스 전쟁과 5차례의 패배

1419년 형 바츨라프 4세가 후스파의 제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소식을 듣고 급사하자, 지기스문트는 정당한 계승권을 내세워 보헤미아 왕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분노한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배신자 황제'라 부르며 거부했습니다. 지기스문트는 교황 마르티노 5세와 함께 십자군을 선포하고 유럽 전역에서 수만 명의 기사단을 규합해 침공했으나, 얀 지슈카와 대 프로코프가 이끄는 후스파의 마차 방진과 화약 무기 앞에 5차례의 십자군이 모조리 궤멸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바젤 협약과 만년의 즉위

군사적 무력으로는 후스파를 결코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지기스문트는 1431년 바젤 공의회를 통해 온건파 후스파(우트라퀴스트)와 비밀리에 협상했습니다. 마침내 1434년 리파니 전투에서 온건파가 급진파를 제압하자, 그는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주는 양형성체를 인정하는 '바젤 협약'을 승인하고 1436년 마침내 프라하에 입성하여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인 1437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없어 룩셈부르크 왕조는 그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