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5대 10국 시대 - 당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나라가 세워진 960년까지 중국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 싸우던 혼란기입니다. 북쪽 중원 지역에서는 5개의 왕조(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가 빠르게 교체되었고, 남쪽과 서쪽 지방에서는 10개 이상의 왕국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발전했습니다. 이 시기는 무력에 의한 정권 찬탈이 빈번했으나, 한편으로는 강남 지방의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달하고 훗날 송나라의 문치주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이기도 합니다.는 베트남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북속 시대' 이후, 곡씨 가문과 양정예 - 10세기 초 남한군을 축출하고 베트남의 자치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강력한 군사 지도자입니다. 같은 지도자들이 이 지역을 독립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광저우를 거점으로 한 10국 중 하나인 남한 - 남한(917~971)은 5대 10국 시대 중국 남해안의 광동과 광서 지역을 지배했던 왕조입니다. 당나라 말기 절도사였던 유은의 기반을 바탕으로, 그의 동생 유암이 광주(번우)를 수도로 삼아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나라 이름을 '대월'이라 했으나, 이후 한나라의 정통성을 잇겠다는 의지로 '대한(남한)'으로 바꾸었습니다.남한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수도 광주는 당시 아랍 상인들과 동남아시아 각국이 드나드는 거대한 국제 항구였으며, 상아, 코뿔소 뿔, 공작 깃털 같은 진귀한 물건들이 활발하게 거래되었습니다. 특히 '청지'라 불리는 남해의 진주 채취 산업이 발달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황제들은 이 부를 바탕으로 금과 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궁전과 정원을 지어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렸습니다.정치적으로는 매우 독특하고도 잔혹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남한의 황제들은 사대부들을 믿지 못해 조정의 관리들을 거세하여 내시(환관)로 만들었으며, 그 수가 무려 2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기이한 통치 방식과 더불어 매우 엄격하고 잔인한 형벌을 집행하여 공포 정치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내부적인 모순과 행정의 부패로 인해 점차 국력이 약해졌고, 971년 북방에서 내려온 송나라의 대군에게 항복하며 멸망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마지막 황제 유창은 도망칠 때 보석을 가득 실은 배를 준비했지만, 평소 믿었던 내시들이 보석만 챙겨 도망가는 바람에 빈손으로 송나라 군대를 맞이했다고 합니다.은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통제력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930년, 남한군은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여 지역 수도를 점령하고 베트남 지도자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저항은 양정예에 의해 이어졌고, 그는 931년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배신으로 양정예가 교공전에게 살해당하고, 교공전은 오권 - 백등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중국의 지배를 끝내고 오조를 건국한 베트남의 민족 영웅입니다.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남한에 다시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이를 빌미로 남한의 황제 유암은 그의 아들 유홍조에게 대규모 함대를 맡겨 베트남을 침공하게 했습니다. 이 원정군은 베트남의 독립 열망을 완전히 꺾어버리려는 의도였습니다.
남한의 해상 공격을 예상한 오권은 백등강 - 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세 번의 큰 승리로 유명합니다. 특히 938년 오권이 남한군을 물리친 전투는 베트남의 1,000년 중국 지배를 끝낸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에서 기발한 방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밀물 때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철제 말뚝 수천 개를 강바닥에 박아두었습니다. 남한 함대가 강으로 진입하자, 오권은 작고 날쌘 배들로 그들을 상류로 유인했습니다. 조수가 바뀌어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퇴각하던 남한 군선들은 강바닥의 말뚝에 걸려 파괴되었습니다. 유홍조는 전사했고 남한 함대는 궤멸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남한은 다시는 침공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939년, 오권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1,000년간의 중국 지배를 끝내고 베트남 독립 왕조 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