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 왕조의 초대 황제 사마염은 조부 사마의로부터 시작된 권력 기반을 물려받아 265년 조위(曹魏)의 마지막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나라를 건국했습니다. 그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후한 말기부터 이어진 장기간의 분열을 끝내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통일 초기에는 법령을 정비하고 점전법(占田法)과 과전법(課田法)이라는 토지 제도를 시행하여 농민들에게 땅을 배분하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 경제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태강의 치(太康의 治)'라 불리며 짧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천하를 하나로 묶은 뒤 사마염은 점차 사치와 향락에 빠졌습니다. 무려 1만 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매일 저녁 양이 끄는 수레가 멈춰 서서 풀을 뜯는 곳의 처소에서 잠을 잤다는 '양거(羊車)'의 전설은 그의 방종을 상징합니다. 이에 영리한 후궁들은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문 앞에 뿌려 수레를 유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도층의 부패는 귀족 사회 전반으로 퍼져, 거부 석숭과 왕개가 서로의 부를 과시하며 설탕으로 솥을 닦는 등의 극단적인 사치 경쟁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사마염은 황실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종친들에게 강력한 군사권과 봉토를 부여했는데 이는 훗날 '팔왕의 난'이라는 참혹한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흉노와 선비 등 북방 유목 민족들을 중원 내부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는 유화 정책을 폈습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노동력 확보와 변방 안정을 가져왔으나, 결과적으로는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갈등을 키우고 훗날 제국을 멸망시키는 '영가의 난'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실책은 지적으로 미성숙했던 아들 사마충(혜제)을 후계자로 고집한 것이었습니다. 사마염은 영특했던 손자 사마휼을 믿고 대를 잇게 했으나, 이러한 오판은 결국 가남풍이라는 희대의 독부(毒婦)가 권력을 장악하고 황권을 무력화하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사마염은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위대한 통일 군주로 시작했으나, 그의 말년 방종과 근시안적인 정책들은 서진 왕조의 수명을 극단적으로 단축시켰습니다. 그가 세운 통일 제국은 건국 50여 년 만에 무너졌으며, 중국 대륙은 다시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기나긴 어둠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사마염의 일생은 한 시대를 끝내는 영웅적인 능력만큼이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절제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